콘텐츠로 건너뛰기
CAAN » 미디어 » 도시와 건축에 대하여 » 건축 설계에 진심을 다한 퇴계(退溪 ; 이황,1501~1570)선생-1

건축 설계에 진심을 다한 퇴계(退溪 ; 이황,1501~1570)선생-1

    1. 이 즐거운 곳 향기를 뉘와 함께 누리리오.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의 부지를 찾은 기쁨에 넘쳐 지은 7언절구 시 /서예 ; 방철린

    이황 선생이 조정에 있던 45세(1545) 때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 발생으로 많은 선비들이 파직과 참변을 당하였다. 이때 파직하였던 이황 선생은 다시 복직은 하였지만 조정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으며 이 즈음부터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이후 외직인 풍기 군수직을 맡아 근무할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1543완공)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하며(1550) 서원 건립운동을 벌였고 서원을 통한 인재양성이 세상를 바꿀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퇴계 선생이 49세에 풍기군수 벼슬마저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유학자로서의 본인 철학적 이론인 이(理)와 기(氣)의 일원적 이원론(一元的 二元論)의 완성을 위한 은자생활을 맘 먹었다. 태어나서 49세까지는 5번 정도 집을 옮겼지만 벼슬까지 포기하고 초야에서 학문과 수양에 전념할 생각을 굳힌 이후로는 기거할 곳의 환경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부지를 고르고 건축 작업을 시작했는데 세 번이나 땅을 바꿔가며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결정한 부지 위에 환경조성을 위해 방당(方塘)을 파고 동서남북 자연 지형물인 대(臺), 당(塘), 천(川)에 명명까지 하며 완성한 집이 한서암(寒棲庵)이었다.

    퇴계 선생은 그 환경 속에서 질그릇 대야와 짚자리를 쓰는 등 세속을 벗어나 거칠고 질박한 생활에 빠져 들었다. 조정에서는 계속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지만 퇴계선생은 거듭된 상소로 귀향을 반복할 뿐 뜻을 굽히지 않았다. 51살이 되자 집의 부족함이 인식되어 한서암을 헐고 그 동북쪽 위치에 다시 또 집을 지었는데 그렇게 지은 집이 계상서당(溪上書堂,溪堂)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서당마저 협소하고 허술하여 쉽게 망가지자 57살 되는 해에 제자들의 청으로 새로운 장소에 또 다시 서당을 짓기로 맘 먹었다. 몇 번의 경험을 살려 집 짓기 전 머리 속의 구상을 감당할 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몇 차례 방문 후 결정한 곳이 지금의 도산서당(陶山書堂) 자리였다. 퇴계선생은 이 생애 마지막 서당 자리를 찾은 기쁨을 시로 표현하였다. 이 시에서 선생의 철저한 자연주의 사고와 새로 지을 집에 대한 기대와 애착을 읽을 수 있다.

    風雨溪堂下庇牀 풍우계당하비상

    卜遷求勝遍林岡 복천구승편림강

    那知百歲藏修地 나지백세장수지

    只在平生採釣傍 지재평생채조방

    花笑向人情不淺 화소향인정불천

    鳥鳴求友意偏長 조명구우의편장

    誓移三徑來棲息 서이삼경래서식

    樂處何人共襲芳 낙처하인공습방

    비바람 치는 계당 책상조차 못 가릴제

    좋은 곳에 옮겨 볼량 숲 등성이 두루 찾았네

    어찌 알았으랴 백년토록 학문할 땅이

    나물캐고 고기낚던 곁에 있을 줄을

    사람맞는 꽃 미소는 정이 얕지 않고

    벗 찾는 새소리는 뜻이 심장하다.

    원림을 옮겨와 깃들기를 다짐하니

    이 즐거운 곳 향기를 뉘와 함께 누리리오

    (주, 三徑 ; 은자(隱者)의 문안에 있는 뜰, 또는 은자가 사는 곳, 한나라 장후가 정원에 세개의 좁은 길을 내고 소나무,대나무,국화를 심은 데서 유래-필자는 여기서 스케일상 원림이라고 해석함)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서예, 글 ; 방철린/칸종합건축사사무소/건축 설계에 진심을 다한 퇴계(退溪 ; 이황,1501~1570)선생-1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