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ceptance and Variation of Modernism
방철린/공간8904__________________________
“근대건축(modernism)의 초기 개념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본정신에 새로운 형태적, 공간적 요소의 變容이 요구되어 왔다. 이러한 변용이 다소 탈근대적 성격을 띄고 있다 하더라도 굳이 탈근대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현대건축 속에서 서구의 근대건축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화되었는가를 본다는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날 한창 극치에 이루고 있는 탈근대주의적 경향이 제아무리 극성을 피운다하더라도 근대주의적 경향은 쉽사리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말
서구의 近代建築(Modernism)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이입, 수용되고 변천되어 있는가?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近代化이후의 現代建築은 어떻게 변천되어 왔나?
近代化가 시작된 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역사를 사는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역사적 현상을 파악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도약의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近代建築受容이라는 명제를 놓고 근대건축(modernism)을 CIAM과 5인의 초기巨匠時代까지의 건축만으로 한정지을 것이냐, 좀더 폭 넓게 그 이후의 초기 이론에 대한 변형까지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될 수 있겠지만 이 글의 목적이 근대건축의 본질을 캐내기 위한 것이라든가 그 思潮의 현시점에서의 평가 또는 다른 건축이론과의 비교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구의 근대건축(modernism)이 어떻게 우리에게 비춰지고 수용되었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함이기 때문에 발생시기의 사회적 상황이나 원인이 우리와 다른 서구 근대건축의 초기이론만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큰 意味가 없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서구의 建築思潮들이 하나의 root를 통하여 시대적 순서를 가지고 이입 되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초기 근대건축과 그 이론의 변형 형태까지 폭넓게 그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이 글을 쓰는 필자가 좀더 사실에 충실하고자 객관적인 내용만을 다루려하나, 잘못된 편견이나 속단이 있더라도 讀者諸賢의 양해를 바란다.
근대화 여명기의 서양과 우리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서구의 문물과 함께 建築思想이 우리 생활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말기(1870年代)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개국정책을 펴게 되면서 비롯된 듯하다. 쇄국정책으로 문호를 굳게 막았던 대원군이 집권 10년만에 자리를 내어 놓음으로서 시작된 이 문호 개방정책 이후 日本을 비롯한 세계열강의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 오면서 국내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 했던 것이다.
이때 日本은 이미 명치유신(1868년)이후 근대화 운동이 한참 추진되고 있었던 까닭에 선진열강의 대열에 설 수 있었으며 조선에서의 세력 확보를 위해 개화파와 손을 잡고 강압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갑오경장(1894년)이며 완전히 타의에 의해서 進行되어진 우리나라 近代化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시민혁명과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결과로 경제체제와 생산방식이 기계에 의존하는 자율적 메카니즘 속에 민주화를 불러들였으며 기계화의 뒷받침이 되는 물리학과 수학의 발전과 함께 민주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과학화, 합리화를 실천하는 근대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건축에 있어서도 이전까지는 특권세력층만 의식하여 형식적이고 의례적이며 관료적인 성향을 갖는 역사주의적 경향에서의 이탈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으나 수공업에만 의존했던 생산과 가공과정으로부터 벗어나 공장에서 생산된 다량의 가공된 제품에 의한 새로운 건축의 구조적, 형태적, 미학적 의미가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古典의 형식에서 벗어나려는 藝術思潮와 손을 잡고 시민계급을 중심으로하는 건축에로의 전환이 서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새로운 소재로 등장한 철과 유리는 건축가들보다도 기술자들에 의해 더 큰 가능성이 보여졌다. 1777년 영국의 「Coal brook dale교」를 필두로 하는 철제아치구조와 현수교에서 이미 새로운 구조미를 과시하였으며 1851년 팩스톤(Joseph Paxton)에 의한 水晶宮이 시금석이 되어 일부 건축가들에게도 철과 유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형식은 르네상스나 자유 르네상스에 속하면서도 정연한 질서와 억제된 장식이 건축에 표현되었다.
Viollet-le-Duc는 그의 대화록(Entretiens)에서 「형태와 필요의 협력」, 「형태와 구조수단의 협력」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건축형태를 요구하게 되었다. 초대형 공간의 가능성과 새로운 미학적 어휘들이 확인 되어지고 차츰 골조 구조의 새로운 가능성이나 대량 생산된 부품의 사용 가능성이 확대되면서 건축 근대화에 서서히 다가서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萌芽期라 할 수 있는 갑오경장 이후부터 세계열강들이 앞다투어 유럽의 역사주의 건축양식을 국내에 소개하였고 특히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노골화되고 유럽에서 이미 전수한 바르크, 르네상스, 절충주의 등의 많은 고전주의적 건축양식을 가진 통치용 건물들을 세우게 되었다. 이는 특히 제국주의의 껍질을 쓴 일본이 식민정책을 실천해 나가기 위한 수단의 발로이었으며 지배계급의 위장으로서의 서구 봉건적-압도적이고 과시적인 건축물을 건설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말살시키려는 일말의 수단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동양적 사고와 철학에 뿌리를 둔 문물에만 젖어있던 우리는 이 시기에 매우 강제적이고 압도적인 제국주의의 식민 정책 하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 수동적 자세로 이들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이들 건축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나 원리를 좀처럼 습득할 수가 없었다.

카톨릭 성모병원
근대건축(modernism)의 성립
유럽에서 산업의 기계화와 함께 중산 시민 계급의 번영이 이루어지고 귀족 계급의 몰락과 새로운 경제체제의 형성 속에 건축의 근대화는 추진되어졌다. 장식을 배제하고 구조, 재료, 기능이 솔직히 표현되어야 한다는 수공예적 미학에서 기계미학으로의 탈바꿈 아래 새로운 미학 – 「단순」, 「진실성」이 대두되었다. 近代主義의 거장이라 일컫는 그로피우스, 미스, 꼬르뷔제의 이론들은 합리주의, 도시의 유토피아, 새로운 조형, 철과 유리, 공업생산 등의 요소들을 기본으로 성숙되어 갔으며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을 성립시킨다.
1930年代를 전후하여 미스와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의 건축가들이 미국으로 건너감에 따라 이들의 활동무대도 근대건축 성립의 이론적 배경이나 필연적 동기, 정당성이 유럽과는 전혀 다른 미대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원래 갖고 있던 근대주의 이론들은 자본주의의 삶의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둔갑하게 된다.
1930년대 전후해서 서서히 우리에게도 근대건축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경성상공장려관(전무역진흥공사전시관, 1929), 조선일보사(1935), 동양극장(1935), 이문당사옥(1938)같은 합리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이 건물들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소극적인 근대건축의 모방에 불과하였으며 피동적이고 단편적이어서 발전의 방향이 전혀 정립되지 않은 유아기적 시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건축 이입 제1시기
1945년이후 서구 근대주의를 접할 시기의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압력의 악몽에서 벗어나긴 하였으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기의 연속이었으며 6·25동란까지 겹치게 되어 우리 민족의 수난시대는 최악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민족성의 말살정책에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지냈던 우리 민족에게 숨쉴 틈조차 주지않은 채 전쟁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져 버려야했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근대건축의 어휘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들 어휘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재료의 선택이나 공법등에 관한 시도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나라의 사회적 현상은 서구의 근대건축 발생의 그것과 지극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多量生産」, 「기계産業化」, 「특권계급에 대한 저항」, 「합리화」등 근대건축이 주장하는 근본 이론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이 시기는 근대건축을 「서구화」의 표상으로 받아들이면서 건축이 갖고 있는 이론적 의미보다 사회의 요구 – 빠른 건설을 위하여 장식이 제거된 단순미와 기능의 합리성 – 전에 없던 새로운 입면요소등 단지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적 기능적 유희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의 건축은 대부분 커튼월이나, 루버, 벽면의 리듬감 등으로 국제주의적 경향이 표현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공군본부청사(1955, 정인국), 부산대 본관(1956, 김중업), 시민회관(1956, 이천승), 남산제1방송국(1957, 김태식), 서울공대 교사(1957, 김희춘), 국제극장(1957, 김정수), 명동극장(1957, 김중업), 명동성모병원(1958, 김정수), 서강대 본관(1958, 김중업), 중앙관 상대(1959, 정인국), 한양대 중앙도서관(1958, 박학재), 한양대 대강당(1958, 박학재), 장충체육관(1960, 김정수)등 전후 새 시대의 개막을 장식하는 작품들이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했으나 커튼 월 디자인은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이 전제가 되는 근대건축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의 형태적인 인용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를 수공으로 완성해야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하였다.
근대건축 이입 및 수용의 시기
정치와 사회의 혼란속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재건운동과 함께 경제성장 전략이 전개되었고 이러한 혁신적 정책에 힘입어 산업의 발달은 물론 건축의 필요성도 점차 증대 되어갔다. 건축의 종류도 점점 다양하여졌으며 규모도 대형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50년대 말기에 비하여 무조건 모방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좀더 근대건축을 이해하고 작가자신 나름대로의 작품을 형성해 가려는 노력이 작품에서 엿보이던 때이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건축가로는 르-꼬르뷔제에게서 修學한 김중업을 꼽을 수 있다. 불란서대사관(1961), 제주대 본관(1964), 삼일로빌딩(1970)등의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조형의지를 구현함으로서 고유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려 하였으며 특히 불란서 대사관은 전통의 낭만적 표현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 수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수근은 유럽 초기 거장들의 국제주의 양식에서 탈피하려고 애쓰면서도 조형성을 많이 추구하였다. 힐탑바(1961), 타워호텔과 해피홀(1962), 자유센터(1963), KIST(1967)등의 건물은 구조의 노출을 시도함으로서 상징성을 노출시킨 김수근의 초기 작품들이다.
이 두 작가의 작품외에도 서울 시립도서관(1964, 이해성), 예총회관(1964, 강명구), 서울공대 도서관(김희춘), 마포아파트(김희춘), 조흥은행본점(이천승, 정인국, 김중업, 박춘명, 유명근), 세종대왕기념관(1969, 송민구), 코리아나호텔(1968, 박춘명), 세종로수운회관(1968, 정인국) 등의 국제주의와 후기 국제주의적 경향, 그리고 작가의 형태적 의지가 표현된 많은 작품들이 이 시기의 주된 흐름을 이룬다.
근대건축(modernism)의 변용
서구에서 이미 ’60년대 초부터 근대건축의 제2세대 건축가들은 초기 근대건축(modernism)의 순수이론에 대해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다. 순수합리주의나 국제주의 양식을 수용한 결과 순수한 조형의 개념이나 공간의 흐름속에서 건축과 인간이 친화되기는 커녕 무미건조한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으며 인간성이 무시되고 소외감마저 느끼게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건축은 수정되어져야 한다는 여러운동들이 일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를 전후해서 이같은 수정운동이 작품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本稿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주로 많이 나타나는 근대건축(modernism)의 수용과 변용의 수법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려한다.
지역성의 표현
’60년대초부터 국제적으로 근대건축의 역사성, 지역성의 결여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각기 自國에 대한 지역성의 고찰, 전통에 대한 이해 작업이 신중히 이루어 졌으며 건축적으로 이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가 논의되었다.

천주교 복자기념 성당
’60년대 말부터 우리에게도 이같은 전통의 수용문제가 거론되어졌다. 戰後 계속해서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외래문화와 함께 근대건축의 국제주의형식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서 「우리의 것이 무엇인가」, 「한국성」, 「전통」, 「지역성」등에 대한 다각적 논의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 표현도 시도되어 졌다.
더구나 정부가 유신체제로 돌입하면서 민족의 주체성이 논의되어지고 전통의 표현이 건축요소로 등장하게 되면서 전통의 지극히 피상적인 표현이 건축요구되는 지역- 경주시- 이 설정되기도 하고 官主導의 발주프로젝트(project)는 전통의 표현이 반듯이 요구되는-이는 독재체제나 전제군주적 발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콘크리트 지붕과 기와와의 직선적 복고주의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독재정권하에서 일어났던 일시적 현상이라 여겨지며 그것이 한국의 근대건축 수용의 주된 흐름의 하나였다라고 보고 싶지 않으나 간헐적으로 지붕이나 기둥 등의 요소들이 직선적으로 인용 표현된 官 주도의 프로젝트(전주시청, 독립기념관(김기웅))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쉽게 간과하기에는 너무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다.

국립국악당
이와 다른 표현기법의 하나는 콘크리트의 彫塑的 표현을 빌린 고건축의 구성형태 또는 요소의 變容을 시도한 형식주의적 수법을 들수 있겠다.1961년 김중업이 설계한 「불란서 대사관」은 우리 한국의 현대건축사에 길이 남을만한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윤승중氏는 『르 꼬르뷔제의 건축을 한국적인 바탕위에 移植시켰다기보다 오히려 그의 탁월한 작가적 조형의지가 르 꼬르뷔제의 건축적방법을 통하여 구현되었다』라고 평함으로서 이작품의 造形의 우수성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의 전통적 형태요소를 낭만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왜색이냐 아니냐의 시비로 몸살을 앓았던 부여박물관(1967, 김수근) 그리고 세종문화회관(1977, 엄덕문), 한국종합전시장(1977, 김정철), 충무공 기념관(1980, 장석웅), 국립국악당(1988, 김원) 등의 작품이 있으며, 좀더 지역성이 밀착되어 기억이나 연상유추 작용을 통하여 지역의 이미지를 갖게하는 작품으로는 복자기념성당(1966, 이희태), 제주대학본관(1970, 김중업), 단국대도서관(1981, 김정식), 인천상륙작전 기념관(1985, 김수근), 국립현대미술관(1987, 김태수), 예술의 전당(1988, 김석철) 등을 들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
그러나 여기서 반성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한국적 요소들의 표현에 있어 피상적인 형태에만 국한된 것인가 아니면 그 요소들이 갖고 있고 기저에 깔린 정신까지 파헤쳐 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전통의 표현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김광현氏는 전통건축이 지녀야 할 형태구조는 미해결된 채로 입면 형태만 중시하고 논리적 체계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한국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였다. 「전통건축을 현대건축의 수법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어디까지나 전통건축의 기능이나 상황 등 건축의 외적인 부분을 오늘날에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식이라는 형태체계나 공간구성 등 건축의 내적인 질서에 관한 것인 이상, 현대건축에 전통적 조형요소를 국부적으로 활용한다는 자세를 지양하고 보다 포괄적인 건축 그 자체의 체계를 연구하고 이를 중요시 해가는 것이다」
유기적 건축
설리반의 철학으로부터 발전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에 대한 이론은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부분들은 각 부분 자체의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각 부분들의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전체와 부분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는 그의 공간 구성의 접근방법을 인상 깊이 나타내 보인 말이다. 유기적 건축은 대개 네가지 종류로 분류되어 나타나는데 그 첫째가 공간구성, 둘째가 자연과의 일체감, 세째가 조형의 구성, 네째가 문맥의 반영이다.

공간사옥
첫째, 유기적인 공간구성을 주제로 하는 작품으로는 김수근 전성시대의 대부분의 건물로 공간사옥(1971~7), 서울대 환경예술관(1975), 샘터사옥(1977), 강원도 어린이회관(1981, 김수근) 등의 작품이 있으며 천주교한강교회(1988, 김원), A 수녀원(1980, 김원), 성균관대 수원 캠퍼스(윤승중, 변용) 등의 다수작품이 있다.
특히 공간사옥은 1970년대의 김수근이 시도한 여러 건축물의 모체역할을 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건물이다. 에임즈 게이트 롯지의 아치를 상기시키는 벽을 가진 센프란시스코의 한 길가에 있는 라이트의 모리스 기프트 샵의 벽과 입구가 연상되는 facade 구성은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주면서도 풍토색 짙은 외벽재료와 함께 보는 이에게 친근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공간구성 면에서 볼때 특히 작은 규모의 건물 속에서 성격이 다양한 내외부 공간을 연속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공간체험의 의외성과 다양함을 성공적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김수근이 추구하던 공간에 대한 철학들… 「인간화된 스케일」, 「한국적 공간」, 「자궁공간」, 「제3의 공간-ultimate space」 등을 실현화 시키려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작품이다.
둘째, 라이트의 로비하우스에서 느껴지는 건물과 자연과의 일체감 – 건물이 서 있는 바로 그 대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연경관의 일부로서 사용하는 유기적 건축에 대한 성공적 사례로는 강원도 어린이회관, 한계령 휴게소(1980, 류춘수), 프레리 하우스(1983, 서상우), 창암장(1971, 김수근), 아리장(1977, 김원석), 삼하리주택(1986, 류춘수)등을 들 수 있고,

전주서문교회
세째, 유기적인 조형언어의 구사를 추구한 낭만주의적 작품으로는 마산성당(1976, 김수근), 전주서문교회(1979, 김정철), 경동교회(1980, 김수근)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각각의 부분들이 성격을 갖는 형태적 요소로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는 통일된 조형성을 추구한 예이다.
네째, 기존의 주어진 환경의 역사적, 지역적, 인문사회적 문맥을 이해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공간이나 조형성을 완성할 수 있다고 보는 문맥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다. 창원새마을회관(1979, 김정식), 이대 도서관 (1981 권도웅, 최태용), 울산대 문수관(1983, 황일인), 용평리조트콤플렉스(1984, 김관석), 한국투자신탁 동래지점 (1985, 김창일, 방철린), 사랑의교회(1985, 황일인), 학봉교회(1986, 김기석), 인하대학생회관(1986, 조성룡), 한국은행 본점(1987, 원정수,지순), 연대 100주년 기념관(1988, 김정철, 김창일) 등의 작품에서 기존의 환경적 에너지나 역학을, 또는 질서나 제약을 반영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국제주의의 變容

국회의사당
우리나라의 근대건축(modernism)의 이입시기(1950년대)의 경향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졌던 국제주의 양식은 3.1로 빌딩(1970, 김중업), 힐튼호텔(1986, 김종성), 우당도서관(1981, 김종성), 등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미스(Mies V. Rohe)의 영향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근대적 조형을 가진 건물로는 서울대 학생회관(1972, 원정수, 지순), 서울대 도서관(1974, 이승우)과 아울러 국립극장(1973, 이희태), 제일은행 본점(1987, 윤승중, 이영희), 국회의사당(1985, 김정수)과 같이 수직선이 강조된 관료적 건물들, 그리고 외환은행본점(1976, 김정철), 한국증권거래소 (1979, 이승우), 한일은행 본점(1981, 윤승중, 변용) 과 같이 자본주의의 안정된 기반을 보여주는 조형성이 표현된 것 등 많은 합리주의적 건물들이 나타난다.

국립현대미술관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적인 형식에서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여러형태로 보여지고 있다. 국민은행 전산본부(1981, 김수근), 통일빌딩(1987, 장석웅)과 같이 하이테크적 이미지를 느낄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는 것, 한국투자신탁 개포지점(1987, 김창일, 방철린), 대한제지사옥(1987, 이기범), 금란예식장(1987, 이해성), 을지로재개발(1987, 김중업) 등과 같이 형태의 조소적 표현이다. 기하학적 도형의 입체적 사용으로 새로운 공간의 경험과 자기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 한국수출입은행(1986, 김정철), 단국대 학생회관(1986, 김정식)과 같이 평면을 엇갈리게 구성하든가 기하학적 도형을 입체구성의 요소를 사용하여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입체구성이 달리보이도록 하는 것 등, 여러가지 무표정한 건물들 사이에서 절제된 근대건축(modernism)의 양식에서 이탈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난다.
맺음말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근대건축(modernism)의 초기 개념은 시간이 갈수록 그 기본정신에 새로운 형태적 공간적 요소의 變容이 요구 되어왔다. 이러한 變容이 다소 탈근대적 성격을 띄고 있다 하더라도 굳이 탈근대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현대 건축 속에서 서구의 근대건축(modernism)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화되었는가를 본다는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한창 극치에 이루고 있는 탈 근대주의적 경향이 아무리 극성을 피운다 하더라도 근대주의적 경향은 쉽사리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글을 줄이고자 한다.
방철린/정림건축/모더니즘의 수용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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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그룹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