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과 숲과 정자가 하나의 완전한 풍경으로 완성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마을 안쪽 자계천(紫溪川)곁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선생의 거처였던 독락당 계정이 있다. 독락당은 이 곳 거처의 전체를 아우르는 명칭이기도 하지만 이언적 선생이 1532년 정자인 계정과 함께 완성한 사랑채의 명칭이기도 하다.
독락당 가옥의 정면 행랑채 오른쪽 문을 지나고 오른편으로 돌아 향나무가 지키고 있는 샛골목을 지나면 느티나무 숲 가득한 자계천에 도달을 하는데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자갈자갈 물 소리를 들으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숲과 어우러진 담장 밖으로 얼굴을 내민 계정의 단아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보는 장면이 계정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란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계정의 모습이 현존하는 많은 고택 의 정자 가운데서도 또한 그러하다.
계정이 이렇게 매력을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독락당 계정을 짓기 전 이언적 선생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이언적 선생은 조선중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동방오현 중 한 명이다. 이언적 선생은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손소의 사위로 들어간 이번과 손소의 딸인 경주 손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손소의 아들이자 외숙인 대학자 손중돈에게서 배웠다. 서백당은 길지여서 훌륭한 인물 세 명이 태어난다 했는데 그중 두 명이 손중돈과 이언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언적 선생은 24세인 1514년(중종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고 승승장구하여 1530년에는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여 경주로 오게 되었다. 부친 이번은 일찍이 거처가 있던 양동마을이 아닌 경주 옥산리에 땅을 마련하였는데 이언적 선생이 1515년 경주학교 주학교관으로 임명되면서 이 땅에 역락재(亦樂齋)라는 거처를 지었었고 1532년 다시 이 곳을 지낼 곳으로 정하고 거처를 짓는 작업에 착수 한 것이다.
이언적 선생은 집을 지으려는 부지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명명하였다. 이른바 ‘4산5대(四山五臺)’가 바로 그 것이다.
유학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과 우주의 원리를 상징하는 4산은 계정을 중심으로 사방의 화개산(華蓋山/동쪽)·자옥산(紫玉山/서쪽)·무학산(舞鶴山/남쪽)·도덕산(道德山/북쪽)에 성리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그 상징성을 군자의 존귀함과 세상의 질서, 변치 않는 절개와 인격의 완성, 세속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 등 갖춰야 할 학문의 도덕적 기준과 숭고한 경지(체:體)로 규정하고 인품을 갖추는 삶의 규범으로 삼았다.
그리고 느티나무 울창한 자계천 상류에 징심대(澄心臺)·탁영대(濯纓臺)에서 시작해 하류의 세심대(洗心臺)에 이르기까지, 자계천에 5대(五臺)를 명명하여 전체를 하나의 캠퍼스’로 선언한 것이다. 흐르는 물과 대(臺)를 날마다 마음을 씻고 가라앉히는 실천적 수양(용·用)의 상징으로 삼고 어디를 다녀도 마음을 씻고 맑게 하는 지성의 지표를 주변에 새겨 넣었는데 그 중심에는 계정(溪亭)이라 이름 진 정자가 존재한다.
계정의 존재성을 강조하고자 계정의 바로 아래 바위를 관어대(觀魚臺)라 하고, 건너편 암벽을 영귀대(詠歸臺)라 명명하였다. 관어(觀魚)는 물고기가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대자연의 천리(天理)를 내 눈으로 직접 관조하겠다는 의지이며 영귀(詠歸)는 공자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던 제자 증점의 유유자적한 풍류로서 자연의 순리와 인간의 내면이 하나가 되는 인(仁)의 경지를 계정을 통하여 굳건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계정을 실패한 학자의 폐쇄적인 은둔처로서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거대한 우주의 이치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것을 내 몸과 가슴으로 체득하기 위해 정교하게 기획된 ‘도학(道學)의 실천 현장’으로 설정한 것이다.
독락당 부지는 부친 이번이 젊었을 적 준비한 땅으로 땅을 고르는 안목이 좋아 거주할 집의 부지로도 좋지만 정자를 함께 지어도 좋을 계곡 곁이라는 환경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계정을 계획하면서 4산 5대라는 유학자로서의 학문을 연구할 정신적 환경적 우주를 조성한데다 독락당이라는 사랑채는 담장 안으로 배치하면서 계정을 적극적으로 담장 밖으로 내밀어 계곡 속의 존재로 인식 되도록 건축적 지혜를 발휘하였기 때문에 계곡과 숲과 정자가 하나의 완전한 풍경으로 완성 되면서 차별화 된 명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 지은 계정의 안쪽으로 두 개의 방을 두고 양진암(養眞菴)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는 이언적 선생이 유교 학자이지만 가까운 신라 고찰 정혜사(淨蕙寺) 주지 스님과의 친분을 갖고 종교의 벽을 넘어 스스럼없는 대화의 장을 갖고 폭 넓은 학문적 정신적 교류를 하기 위하여 의도를 가지고 만든 암자 이름이었다.
그리고 계정에게 자리를 내준 역락재라는 편액은 독락당의 서편에 지어진 안채에 다시 걸려 이 후 어머니를 모셨던 실의 명칭으로 탈바꿈되었다 한다. 계정을 중심으로 지어진 독락당은 시간을 두고 후손들에 의해 몇 번의 증축과 개축의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완벽한 모습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언적 선생이 1508년 결혼한 함양 박씨 부인에게서 후사가 없었는데 관비 양주 석씨에게서 이전인(李全仁:1516~1568)을 낳았다. 1515년 이언적 선생이 역락재를 지었던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이것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1517년 이전인은 석씨 가문의 노력으로 어머니 석씨와 함께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는데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강계로 유배 된 이언적 선생이 생을 마감할 때(1553년)까지 6년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서첩 만드는 일을 도왔으며 선생 사후에도 시신을 경주까지 운구하여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전인의 뛰어난 효행과 부친의 학문을 지켜낸 공로가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명종)의 특명으로 과거시험 절차 없이 관직을 제수받게 되었고 은진현감(종6품)까지 역임 하였단다. 이전인은 이언적 선생의 서책 출판과 업적 보존에도 혼신을 다 하였지만 유산으로 물려받은 유품 과 독락당은 대를 이어 계속 관리되고 증축 보존 될 수가 있어 오늘날의 품위 있는 문화유산이며 보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락당과 연관하여 회재 이언적 선생은 1535년, 15수 연작으로 되어 있는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을 지었다. 이 시들는 『회재집』 24권에 수록돼 있다. 다음 시는 이중 「溪亭(계정)」이란 시로 당시의 계정의 풍경과 회재 선생의 심경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였다.
喜聞幽鳥傍林啼 희문유조방림제
新構茅簷壓小溪 신구모첨압소계
獨酌只邀明月伴 독작지요명월반
一間聊共白雲棲 일간료공백운서
근처 숲 산새소리 기쁘게 들려오고
새로 지은 초가정자(茅簷) 실개울 굽어보네.
홀로 잔 부으며 밝은 달 맞이하고
한 칸 집 흰 구름과 오로지 같이 사네.
여기서 모첨(茅簷)은 초가를 의미하는데 현존하는 계정은 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다. 모첨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계정을 짓기 전에 17년 전에 지은 초가 역락재가 있었고 그걸 계정으로 지으면서 기와집으로 바꿨지만 군자의 겸손의 표시로 초가로 표현했을 거란 의견과 기와를 나중에 올렸지만 시를 지을 당시는 초가였을 거라는 두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계정의 모습을 필자가 오래 전에 펜으로 그렸던 스켓취가 있어 최근에 쓴 서예 글씨와 함께 글을 올린다.

방철린/칸종합건축사사무소(주)/https://myca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