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철린은 1948년 쥐띠다. 나랑 한 바퀴. 한양대학교 건축과 졸업하고 김수근 사단에 합류한다. 그 유명한 명작 공간사옥을 만든다. 김수근 선생이 너무 세다. 1978년 승효상과 엑서더스다. 국제엔지니어링으로 가니 월급이 두 배로 오른다. 장가나 가자. 만지는 프로젝트마다 무산(霧散 안개가 걷히듯 흩어져 없어짐)된다. 돈은 만졌지만 재미가 없다. 역시 두 개 다 가질 수 없군. 다시 탈출. 승효상은 김수근에게 가서 무릎을 꿇었다. 선상님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래 승효상은 다시 김수근 사단에 복귀. 1986년 김수근 선생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게 된다.
방 철린 은 정림건축으로 간다. 아빠, 정림건축은 언제 만들어진 회사야. 1967년. 누가. 김정철(1932- ) 아빠, 옛날에 그 회사 책 만들지 않았어. 맞아. 김정철회장님 작품집 만든적 있어. 잘 팔렸어. 아니. 그래 열받아 아빠는 건설현장으로 간거야. 응, 그렇구나.
무 릎 꿇기도 거시기하고. 신언학, 김기웅, 최태용, 김자호 등 별들이 모여 있다. 김수근 사단을 탈출한 망명객들이 죄다 정림건축으로 간 거다. 마침 정림건축은 한국은행 본점 현상에서 2등작이 된다. 1등작인 원정수교수가 사무실이 없다. 그럼 둘이 같이 해라. 그래 드림팀이 만들어 진다. 정림건축의 김자호, 이성관, 방철린과 원정수교수측의 임창복이 실시설계에 참여한다.
정 림건축의 한 층을 통째로 빌린다. 연면적 3만 5천 평의 엄청난 프로젝트. 설계비도 짭짤하다. 80% 완성. 전화가 왔다. 취소. 땡전이 행정수도를 대전으로 이전한다나 뭐라나. 원정수는 이제 간삼건축의 수장이 되고. 1985년 정권도 바뀌고. 행정수도 이전 다시 취소. 그래 한국은행 현상설계 재추진. 다시 원정수 당선. 이제 1만 5천 평으로 줄어든다. 좌측 날개는 통째로 날아간다. 이제 돈이 없는거다. 지하 공간도 대폭 축소되고. 지금의 한국은행 본점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다.
아 빠, 그럼 한국은행 본점 앞에 있는 저 오래된 건물은 뭐야. 저게 원래 한국은행 본점이야. 누가만들었는데. 일본의 건축가 다쓰노 깅고(1854-1919)의 설계로 1912년 준공. 임금의 별궁인 달성이궁達成離宮을 막무가내로 헐어내고 만든 3층 규모의 연면적 2,600평의 건물. 볼수록 열 받는 건물이지만 어쩌랴 힘없어 당한 일.
좌우 끝과 측면의 모서리 3곳의 원형 계단실에 사라센풍 돔을 얹은게 특징. 평면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지하에는 대형금고가 있다. 6·25전쟁 때 폭격당했으나 1989년 복원. 1981년 사적 제 280호로 지정.
이 제 방철린은 6실 실장이 된다. 유일한 디자인실. 후에 1실부터 7실까지로 확대된다. 단 4실은 없다. 재수가 없어서. 월급도 대폭 오르고 소나타도 제공된다. 방철린은 상종가를 친다. 매년 현상설계에 당선되는 거다. 부산 엠비씨사옥을 시작으로, 해광빌딩, 한국전력 부산지사. 한국전력광명지점. 당선율 100%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고속 승진.
1988 년 40살에 이사가 된다. 또 현상설계가 나왔다. 대덕과학문화센터다. 5팀이 나왔다. 방철린은 젊은 디자인으로 간다. 왜 만날 건축이 무게를 잡아야 되냐. 대전 중심지로 가는 대로를 인정한다. 1층은 띄운다. 전면에 옥외주차장을 널찍하게 둔다. 왜 꼭 주차장이 뒤로 숨어야 되냐. 거꾸로 간다. 사람들은 전면의 널찍한 계단으로 분수를 바라보면서 올라간다. 시원하다.
어 라 후면에 웅장한 산이 있다. 인정한다. 산의 기가 통하게 건물을 시원하게 뚫어 버린다. 좌측은 과학문화재단을 방문한 손님들을 재우는 게스트하우스다. 산의 형상에 맞게 건물 전체가 파도를 친다. 우측은 콘서트홀이다. 좋다. 축구공으로 간다. 동그란 축구공 안에 홀을 만든다. 왜 꼭 콘서트홀이 상자야 되냐 뭐 이런 거다.
임원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이봐, 방이사. 진짜 축구공으로 갈건 가. 야. 나 원 참. 다음날엔 다른임원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이봐, 방이사 이거 진짜 제출할 건가. 그럼요. 아님 대안을 보여주서유. 됐네. 나 원 남사스러워서. 건축이 파도를 쳐. 정림건축이 발칵 뒤집어졌다. 오기로 제출했다. 떨어지면 집 나가야 된다. 당선. 당선이유. 축구공과 파도를 잘 활용했음. 연면적 7천 평. 이제 한국 건축가협회 작품상도 수상한다. 여기서 방철린이 설계 당시에 쓴 시 한번 들어 보자.
자연, 인간 과학은
과학문화센터의 디자인 정신이다.
자연과 인간이
과학속에 살게 하자.
뒷산은
과학인에게
정서를 일깨워 준다.
자연의 맥과 도시를 연결시키자.
자연의 맥과
도시를 연결시키자.
자연이 원하기 때문이다.
정사각과
직선과 트러스는
과학의 은유이며
산과 오솔길
구름과 물결은
인간의 은유이다
자연과 인간의 기초
과학의 차디참 속에
체온을 불어넣자.
공 사 중에 이 게스트하우스는 1993년 호텔롯데대덕이 된다. 다 빌려준다. 그래도 운영이 어렵다. 2003년 호텔롯데대덕도 철수. 목원대학이 사들인다. 학생들 기숙사로 쓴다. 교육부에서 난리가 났다. 이거 뭐여. 호화판이네. 팔아라. 인가가 안 난다. 다시 매물로 나왔다. 이제 누가 사려나. 슬픈 건축의 운명. 아빠, 목원대는 언제 만들어진 학교야. 1957년. 원래는 감리교 대전신학교. 1972년 목원대학으로 이름을 바꾼다. 건축과 있어. 응.
1990 년 봄 3명의 건축가가 모여 소주를 먹었다. 우리 쿠데타 한 번 하자. 혁명동지는 백문기(1948- 한양대), 우경국(1948- 한양대), 이종상(1948- 한양대). 쥐띠들. 야, 우리 언제까지 5, 6학년들한테 끌려 다닐꺼냐. 쿠데타 하자. 실패하면 다 죽는 거고. 우선 4학년들만 꼬시자. 단, 학교는 다 달라야 된다. 이미 뜬 건축가는 배제한다. 우린 언더그라운드 건축가다.
그래 14명의 건축가들이 소주집에 모인다. 면면 보자. 지금은 이미 대한민국 건축의 주인공들이 됐다.
어 라, 연세대는 없네. 명지대도 없고. 4.3 그룹 다시 만들어야것다. 왕고는 조성룡. 47살. 막내는 이일훈 38살. 48살의 김원은 이미 제도권 건축가라 탈락. 자격은 3, 4학년. 그래 1990년 4월 3일 강남의 한 음식점에 모였다. 유원재 참석 거부. 또 다른 제도권이 되기 싫다. 난 영원한 언더 하겠다. 그래 부랴부랴 김인철 (1947- 홍익대) 가담.
이 른바 4.3그룹이다. 쿠데타다. 14명이 각자 현장에서 자기 작품을 설명하고 13명이 씹는다. 매달. 호스트가 모든 경비를 댄다. 좋다. 김인철의 부산 작품에서 난상토론. 김인철은 숙식, 비행기 표까지 문다. 매달 하니 14개월 걸린다. 서로 기를 주고받는다. 업그레이드한다. 언론에 알리지 말자. 소문이 났다. 건축 잡지사들이 하나 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매 년 세계여행을 간다. 제 1회 여행지는 일본의 도쿄, 오사카. 제 2회 여행지는 유럽. 1992년 전시회를 연다. 각자 최신작품을 제출한다. 자비로. 대박이다. 이제 4.3은 화두가 된다. 안그라픽스의 안상수가 이 전시회 결과를 책으로 묶어낸다. 값 25,000원. 골판지 표지의 이 도록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건축 책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아트가 되기도 한다. 딸 안상수 알아. 몰라. 나 원 참.
안 상수(1952- ) 충주 생. 홍익대 미대 학사, 석사. 한양대 박사. 1981년 월간 <마다> 아트디렉터. 1985년 <안그라픽스> 설립. 1991년 홍익대 미대 교수. 한글 서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한국의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의 거장. 딸. 아시아나항공 기내지 있지. 응. 그거 안그라픽스에서 한거야. 그럼 돈 많이 벌었겠네. 응.
1990 년대 후반 더 이상 4.3그룹은 모이지 않게 된다. 이미 이들은 뜨면서 다시 제도권이 된 거다. 나이도 이미 5, 6학년이 되고. 연락도 없다. 다시 아래 것들의 쿠데타 대상이 된 거다. 이게 세월이라는 거다. 딸 오늘의 사자성어는 곡학아세曲學阿世다. 누가 한 말인데. 사마천 가라사대.
중국 한漢나라의 경제景帝 때, 강직하기로 이름난 원고轅固라는 학자가 엉큼하고 비열한 공손홍公孫弘이라는 학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단다.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무정학이언 무곡학이아세
배운 것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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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른들이 삐딱하게 보기 시작한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어린 것들이. 그럼 나간다. 광야로. 임원이 붙잡는다. 어이 방이사. 사장하고 나가지. 싫어유. 이번에 안 나가면 기회가 없어요. 제가 벌써 44이걸랑요. 나가면 추울텐디. 한 번 가난을 즐겨볼랍니다. 14년 월급쟁이. 지겹습니다. 그래! 후회할 걸.
1991 년 동기 백문기와 함께 포이동에 인토건축 설립. 인간과 흙을 같이한다. 자연으로 돌아간다. 뭐 이런 뜻이다. 역시 동업 어려운거 아시죠. 1994년 갈라선다. 역삼동에서 인토건축 혼자 운영한다. 2006년 다시 서초동으로 옮기면서 맥건축의 곽재환과 동업. 건축그룸 칸이 된다. 이제 방철린도 6학년이 된다. 우째 세월이 이렇게 빠른지. 이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