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공간연구소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이다. 중동 붐이 일기시작하면서 공간연구소에도 중동 일이 들어오게 되었다. 몇 개의 프로젝트 중에 ‘엑바탄’ 이라는 공동주택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 일이 들어오게 되면서 사무실의 인원은 물론 사무실 면적도 상당히 요구되었다.
원서동 공간사옥이 1974년 내가 입사하기 직전 완성되었는데 75년에는 다시 증축계획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계획은 급하게 진행되어 그 이듬해 해동이 되면서 곧바로 집을 지어야 하는데 운 좋게도 이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공사는 공사 시작 전에 받아놓은 건축허가 내용과 전혀 다른- 거의 새로 그려지고 스켓치 되는 도면에 의해 1 : 1 스터디 모형 만드는 기분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물론 이렇게 집이 지어지다보니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나를 포함하는 공간의 어느 누구도 공사가 진행되는 그 다음 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낮에는 현장에서 목수와 씨름을 하고 밤에는 앞으로 지어질 부분에 대해 설계실에서 도면을 그리고 왕당-김수근교수를 공식석상에서는 K.S.G.라 하고, 사석에서는 그렇게 칭하였다.-과 공사될 부분에 대해 이야길하여 결정을 하곤 하였다.
이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무실에 비상이 걸렸다. 원서동에 있는 모든 직원들은 주간근무를 마치고 저녁에는 정동사무실로 모두 집합하라는 명령이다. 이란의 엑바탄 프로젝트가 불이 붙은 것이다. 해외 일을 위하여 정동에 사무실을 빌려, 이 곳에서 설계가 진행 되었는데 지금 기억에 이 프로젝트의 대지가 약300미터×2000미터 의 비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배치도를 작성하는데 대지의 폭을 트레싱 페이퍼 전지 폭에 맞추어 그리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그 도면 크기가 자그만치 1미터×7미터다. 이렇게 도면을 크게 그려 이란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자는 것이 왕당의 심산이었던 것같다.
모든걸 컴퓨터로 해결하는 지금이야 작업공간도 그렇게 넓게 필요하지도 않고, 용량이 많아서 나누어 그려야 한다 해도 컴퓨터로 작업을 하니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군데 모일 필요도 없으며, 반복 작업은 'copy'나 ‘move'라는 명령어로 얼마든지 도면을 옮기고 복사하며 빨리 그릴 수도 있거니와 표현을 하려면 포토샵에서 eps파일로 불러들여 레이어 별로 포토삽의 각종도구를 이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신속하게 넣을 수도 있고 테스트를 거쳐가며 선택적으로 최종안을 만들 수도 있으며, 도면크기도 축소확대는 물론 negative며 duo tone이며 다양한 효과도 가능하지만, 그 모든 것을 사람 손에 의해서 그려야 하고 일일이 효과를 넣어야 했던 완벽한 아날로그 시대였던 그 때에 이런 큰 도면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도면에 모두 달라붙어 그리는 것 외에 별 뾰죽한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공간에 근무하던 이 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매일 밤을 새워 설계를 하였던 터라 이에 덩달아 갈고 닦여진(?) 잉킹 실력을 왕당이 십분 활용하고자 함이었을까? 칼과 창을 든 무사들 같이 공간멤버들이 모두 각자의 연장(?)을 챙겨 실력발휘를 할 때라도 만난 듯 한자리에 모였다.
그때 사용하던 잉킹 도구들은 지금은 박물관에나 보낼 것 들이지만 그 때에는 다른 설계사무실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획기적인 것이어서 그 것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 도구들을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까마귀 입같이 생긴 오구의 새로운 버전으로 탄생한 로트링 펜이라는 것이 어찌나 선의 굵기도 자유자제이고 편했는지 마치 칼 잘쓰는 칼잽이가 이칼 저칼 바꿔 가며 칼을 휘드르듯 로트링 펜을 능수능난하게 사용하며 도면을 날려댔다. 리로이 셑트로 글씨를 날래게 써대는 것을 자랑으로 알다가 레트라 셑트라는 판박이가 나와 글씨체도 맘에 드는체로 골라서 그래픽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됨에 열심히 판박이를 해놓고는 신통하다는 듯, 눈을 지긋이 감고 감상을 하다가 옆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게 웃어가며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음을 고마워했었다. 그때 고마웠던 도구들은 그 뿐 아니다. 변이삼각자도 그 중의 하나- 보통은 입사가 되면 30도 자와 45도 자 두 개가 지급되는데 조금 경력이 있는 사람은 변이삼각자라는 것을 써서 요술을 부리듯 자기가 원하는 각도의 선들을 마구 그으며 설계를 하고, 신입사원은 그 모습을 부러워하며 ‘나도 돈을 모아 저것 사야지’ 하던 때다. T자가 아닌 I자가 외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전기 지우게, 운형자, 곡선자, 변기 템플레이트,, 원형 템플레이트, 칼라톤, 스크린톤.... 모두가 지금은 설계사무실 설합이나 창고에 틀어박혀 계륵신세가 되어버렸고 전설같은 역사 속에 파묻혀 버렸지만 그땐 첨단이었다.
여럿이 모였으니 누구랄 것 없이 자연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이럴 때마다 웃음보가 터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업은 무르익어 가고 점찍는 소리(잔디표현을 위한 소리)며 전기 지우게 돌아가는 소리도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옆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도면에 효과를 내고 있는데 ‘저기...’ “잠깐만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 멈칫 올려다보니 눈을 깜빡깜빡하며 임정의씨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자기에게 주목해달라는 말이 쑥스럽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찍은 사진이 바로 이사진.
야식도 먹고, 서로 옛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밤새 작업을 하노라면 어느새 먼동이 터 오고 대견하게도 그 큰 도면이 근사하게 마무리 되어간다..... .
며칠 밤을 새고 이렇게 그려진 도면은 또 일본으로 보내지겠지. 그리고 며칠 후면 한국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분위기 있는 흑사진이 또 만들어져 오겠지? 자! 이제 공간사옥 현장에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