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肅靖門)의 성 안쪽 모습 / 루에 오르는 계단이 특이, 원래 암문으로 루가 없었다 함.(1976년 복원시 루 설치)
숙정문(肅靖門)의 성 밖 모습
청운대(靑雲臺)남쪽전망 / 경복궁과 세종로
청운대(靑雲臺) 북쪽전망 / 멀리 삼각산 능선, 가까운 능선의 오른편 끝-곡장(曲墻)
창의문 (彰義門)
한양(漢陽)의 주산(主山), 백악(白嶽)
/ 숙정문(肅靖門), 곡장(曲墻), 청운대(靑雲臺), 백악마루, 창의문 (彰義門)
한양 도성의 성곽길은 국내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자연과 서울의 역사 그리고 문화와 인문적 숨결을 느끼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 환경이 아직 어설프다. 조성하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각 분야별로 따로따로 설치하고 공사하여 있어야 할 것 없애야 할 것 개선해야 할 것 어울리지 않는 것 등이 조율되지 않고 마구 쏟아 부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 남아있는 견치돌쌓기, 정리되지 않은 바닥, 계단의 위치와 재료, 성곽 옆으로 계속 따라 설치한 전신주(인왕), 성곽 안팎의 전선케이블, 성곽주변 설치물, 외등과 조명기구(디자인과 크기와 위치), 구구각각인 싸인보드와 안내판의 형태와 위치와 색체, 초소의 위치와 디자인, 조경의 구성과 나무선정 등 방문객 입장에서 세세하게 들여다 보는 안목있는 건축가가 전체적인 조율과 지속적 관리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희문에서부터 혜화문까지 걸으며 성곽 내 외부 도시와 자연을 음미하는 맛은 아주 특별하다. 낙산이 낮아 오르기도 어렵지 않거니와 서울 성내가 손에 닿을 듯 다 보이기에 서울의 구성을 디테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역사의 이야기도 젊은시절 추억도 되짚어 보는 맛이 솔솔하다.
광희문/고 지도를 보면,광희문을 시구문(屍口門),수구문(水口門)이라고 칭한 지도가 눈에 띈다. "시구문"은 소의문(昭義門,서소문)과 함께 시체를 내보내도록 하여 붙여진 명칭이지만, "수구문"은 부근에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어 이 문들과의 혼돈으로 잘못 씌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광희문 주변 성곽
이간수문(二間水門)/한양의 목멱산 남소동(현재 국립극장과 장충단공원일대) 지역의 하수가 오간수문(五間水門)과는 별도로 성곽을 빠져나와 성(城)의 외각에서 청계천과 합류하도록 설치된 수문, 청계천의 주 수문인 오간수문은 오간수교라는 다리이름으로 만 남고 철거되었다.
흥인지문
흥인지문의 옹성 안쪽 마당은 안타깝게도 들어갈 수 없게 막아 놓았다. 숭례문과 같이 안팎을 드나들 수 있게 하는 배려가 아쉽다.
흥인지문 주변 성곽길
한양의 우백호 격인 인왕산
한양의 주산인 백악산(북악산)
낙산 의 외부 성곽길
낙산의 외부 성곽길
한양의 북소문 격인 혜화문을 향한 낙산 외성곽길, 한양성곽의 주산인 백악의 줄기가 조산인 북한산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혜화문부근/ 낙산의 성곽은 고도가 낮아져 헤화문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북악산을 향하여 산등성이를 오른다.
남도에 가는 길에 구례 운조루(求禮 雲鳥樓)에 들렀다. 운조루는 호남 지방에 몇 안 남아 있는 주요 건축문화유산 중 하나다. 잠깐 들러 본 내용이지만 다른 주택과는 다른 특별한 점들이 눈에 띄어 몇 자 적어 보려 한다.
운조루는 문화 류씨 류이주(柳爾胄,1726-1797)의 자택으로 영조 52년 (1776년)에 완성되었다 한다. 류이주는 28세에 무과 급제 후 지방 수령이나 대규모 국가 조영 사업 책임자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가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집을 계획하고 현장에서는 아들이 감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두대간의 루트이자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인 노고단(1507미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산등성이 줄기는 평지에 가까워지면서 좌우로 갈라져 좌청룡 우백호를 형성하고 그 사이 부분이 완만한 경사로 내려오면서 혈(穴)이 만들어지는데 운조루가 그 중앙부에 자리를 잡았다. 운조루 1.6km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섬진강이 흘러 이 자리가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정면의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길은 동입서류(東入西流)의 도랑과 방지(方池) 사이를 따라가다 도랑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두 개의 명당 수로 풍수(風水)의 명당자리를 완성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여기 흐르는 물은 지리산에서 막 내려온 맑은 물로 수량도 많아 시원함과 함께 이 집의 넉넉한 인심을 예상케 한다. 이 다리를 건넘으로써 잡귀를 떼어 버린다는 의미를 가진 이 개천의 개념은 궁전 건축에서 많이 쓰였으며 운조루보다 50년 후에 창덕궁 내에 왕자를 위한 샘플로 지어진 연경당에서도 볼 수 있다.
영정조 르네상스 시대 건축답게 길게 쭉쭉 뻗은 건축물 형태도 시원스럽거니와 건축의 배치도 매우 독창적이다. 유교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에 남녀유별함이 있는 배치임에도 집의 공간구조에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전라 구례 오미동 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에는 현존하는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외에도 곳간채 곁에 안 사랑채가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대가 남자의 우월함만이 존재하던 시대였지만 드물게 여성과 2세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아들이 성장하여 집 짓는 일의 감독까지 할 때가 20세 성인이었으니 완성 후 사랑을 사용하게 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안채 동쪽에 있는 사랑은 누구용 이었을까? 부인을 위한 작은 사랑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지만 세 개 정도의 사랑채를 집안에 만든다는 발상은 찾기 쉽지 않은 예인 것 같다.
이 집이 사랑이 세 개나 되고 재실 등 다른 주택에 비하여 복잡한 실의 구성과 외부공간을 갖고 있는 대형 주택임에도 각 존의 독립성과 동선 연결의 유연성을 함께 해결 한 점이 눈에 띈다. 솟을 대문에 들어서서 왼쪽에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된 두 개의 사랑을 가진 기억 자형 사랑채와 오른쪽에 터진 미음 자형 안채를 겹쳐놓아 두 매스가 중복되는 위치에 배치된 중문간을 둔 게 독특한 배치다. 이 중문간이 집 전체를 소통시킬 수 있는 허브(hub) 역할을 맡도록 하여 복잡한 동선을 쉽게 해결하였을 뿐 아니라 시퀀스 상의 공간 전개의 다양한 구성을 만들고 있다. 하회 마을이나 양동 마을의 주택들, 해남 윤선도 고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독특한 방법으로 공간 소통과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공간 조직을 보면 류이주의 건축에의 조예가 남다름을 엿볼 수 있다고 본다. 못 본 부분도 많지만 갈 길이 바쁜 여정에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사랑 채에 대한 이야기를 써 올려 놓았지만 작은 사랑 채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다섯 번째 사진에 사각으로 찍힌 편액을 잘라서 포토샵으로 펴 보았습니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고교동기 박찬홍박사의 도움까지 청 하여 闇修齋(암수재)임을 확인하였지요. 숨어서 학문을 익히라는 교훈이 담긴 편액 이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아들을 위한 사랑채 임을 알게 하는 편액인거죠. 역시 제 추측이 맞았습니다. 작은 사랑채는 아들을 위한 사랑채였습니다.
작고 흐릿하지만 안채의 사랑에 관한 자료도 찾았습니다. 안채 사랑이 표현되어있고 "弄月O"라고 써있습니다. 여성 용 안채 사랑입니다. 부인들을 위한 사랑이 있었다는 후손들의 인터뷰 내용도 있더군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분명히 여성을 위한 사랑이 존재했었습니다.
첫째 날은 강릉쪽으로 가는 길에 평소에 가고 싶어했던 불교의 성지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사자암(獅子庵)-적멸보궁(寂滅寶宮) 코스로 정하였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中臺寂滅寶宮)이 해발1,200미터부근에 있어 깊고 높은 산의 정기도 느끼고 적멸보궁도 볼 수 있는데 해발 850미터인 상원사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여 무리없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원사 와 사자암 그리 적멸보궁 은 모두 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신라 성덕왕때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지어진 사찰로 가장 오래된 동종(銅鐘)을 비롯한 많은 불교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적멸보궁을 제외한 상원사와 사자암의 많은 당우(堂宇)와 탑들은 거의 20세기에서21세기에 중창(重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배치에 걸맞는 건축물의 자세와 생김에 품위가 느껴지는 좋은 건축물들이었다.
적멸보궁에 오르는 중간에 있는 사자암은 해발 1,100미터부근 급 경사지에 지은 암자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계단식 5층 건축물로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적멸보궁 뒤편 부처사리를 모셨다는 넓지 않은 공간에는 조그마한 석탑이 존재한다.
예전에 안영배 교수는 이런 공간을 승화공간이라 칭하였다.
같은 부처사리를 모신 양산 통도사(梁山 通度寺)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이에 해당한다.
사자암에서 부터 적멸보궁까지 오르는 동안은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사자암에 올라 구경을 마치고 적멸보궁으로 향하는데 하늘은 많이 흐렸고 구름 속에서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더욱 우렁차게 변하였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그리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람소리가 심하였다.
상원사에서부터 길 옆에 일정 간격으로 놓여있어 석등인가 생각했던 석물에서는 나즈막하게 염불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석물 속에 스피커가 장착되어 있었던 거다.
그 소리는 크지는 않으면서 옆에서 이야기하듯 친근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머리 속에 신곡( La Divina Commedia, 神曲) 속에서 단테(Alighieri Dante)가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안내를 받으며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을 여행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여기가 연옥 쯤 될까? 베아트리체(Beatrice)는 볼 수 있을까?
불국정토에서 천국 이야기가 떠오르다니.... 저 염불소리는 무엇일까?
사자암 비로전 앞에서 본 사자상을 타고 온 문수보살이 날 안내하는 소리일까?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 대신 문수보살?
저 높은 하늘의 우렁찬 바람소리는 무엇일까?
극락정토에서 나오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호령일까?
적멸보궁에 가면 베아트리체 대신 만날 천사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 속에서 맴도는 동안 숨 가쁜 줄도 모르게 어느덧 적멸보궁에 다달았다.
적멸보궁 정면에 달았을 때 나도 모르게 나는 합장을 하고 있었다. 합장이 끝나고 적멸보궁 안을 훔쳐보듯 살며시 들여다 보았다.
세조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였으나 숙종대에 이르러 다시 왕으로 복위하였으며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능호를 장릉으로 추복하였다 한다. 그럼에도 능의 형식이 능침의 난간과 병풍석 외에도 많은 석물이 없는 등 간소화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능의 전면에 있는 석등은 사각지붕 형으로 다른 능의 석등과 디자인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한가위 연휴 기간동안 영월 청령포와 장릉엘 다녀왔다. 단종, 출생후 바로 모친을 잃고 부친인 문종(조선5대 임금)마저 승하하자 혈혈단신 어린 나이에 조선의 왕위에 오르지만 제일 가까이서 도와야 할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1455) 되었다가 16살 어린 나이에 끝내는 죽음을 맞이하였다(1457). 가장 믿고 싶었던 숙부에게 배신을 당한 어린 단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저 송림은 단종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까? 비밀을 간직한 채 아침 이슬 머금은 청령포 의 초가을 경치는 상큼하기만 하다.
고기잡이 배의 출항으로 매우 분주한 대명포구, 그리고 19세기후반 신 문화 격변기에 바다 건너 마주한 강화도의 덕진진과 함께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감당했던 덕포진. 숨어있는 역사의 장소 속을 더듬고 다니니 미(美)의 발견 또한 즐겁다. 마침 북쪽으로의 먼 여행을 앞둔 기러기 도래지도 있어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바이러스 방역으로 아이들 없이 보낸 설날. 성묘를 마치고 오랜만에 여주 신륵사엘 들렀다. 남쪽으로 여강(麗江)을 보고 있는 이 사찰은 높지 않은 위치에 있지만 전면이 터져 다른 절에서 맛볼 수 없는 시선의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는 특이함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숭유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능이 여주로 이전 되는 덕분에 영릉원찰(英陵願刹)이 되면서 규모가 커져 임진왜란 시 왜군을 물리치는 승병 역할이 매우 크기도 하였지만 반대 급부 적으로 사찰이 대부분 전화(戰火)의 수모를 면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언급 하였듯이 다른 절에는 없는 강변 의 기이한 바위 마암(馬岩)과 그 위의 강월헌(江月軒)이 있고, 또 전쟁 후 다시 지어진 조선시대의 절 집들과 함께 석탑, 전탑 등 많은 보물이 남아있어 하나하나 건축적 가치와 문화유산적 가치를 음미하며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변으로 나 있는 비 환경적인 도로나 강 건너 보이는 경치 등 비 전문가 적 환경 조성이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가까이 공포(다포)와 지붕 서까래가 보이는 전각이 극락보전으로 이절의 주 전각이다. 아미타경에 의한 불전으로 이 전각 안에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미타경은 서방정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서쪽에 배치하여 동쪽을 보고 전각을 안치는데 여강을 바라보게 하려니 자연히 남향이 되었다. 그리고 극락보전 앞에는 보통 안양루나 안양문 등을 배치하는데 저 앞 마당 건너에 보이는 루는 당호를 구룡루(九龍樓)라 하였다. 신라 진평왕 시절 원효가 이곳에 있던 연못에서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한 후 절을 지었다는 전설에 기반한 듯하다. 오른편 기와는 요사채 지붕이다.
사실 구룡루 전면의 분위기가 실제론 좀 어수선하여 마음에 안 드는데 강이 보이는 것이 좋아 앞으로 좋아질 것을 상상하며 올렸다.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다.화강암 기단부, 전돌로 된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가 깨끗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모든 층의 탑신에 비해 옥개의 돌출이 작아 비례적으로 소극적인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탑의 여섯 번째 층의 옥개 부분 위에 작은 탑신과 옥개같이 보이는 부분은 탑신과 옥개부분이 아니고 탑의 상륜부의 시작인 노반이고 그 위에 복발, 앙와 그리고 상륜이 올라간다.
이 부분 분위기가 이 절의 하이라이트 인 것 같다. 조선시대 지리서 택리지에도 저 강월헌과 절벽 마암 이야길하는데 그 밑에 용이 살고있다는 전설까지 이야기한다.
여기는 전화(戰火)로 없어진 듯한 빈터에 새로 지은 부속 절집이다. 일반 신도나 방문자들이 묵으며 수도할 수있는 템플 스테이다. 다소 커보이기는 하지만 소나무들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