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속의 언어, 그 한국적 감수성에 대하여 On the Korean Sensibility in the Architecture
(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김승귀 디렉터 교수와의 대담) |
김승귀: 방철린 소장의 건축적 출발과 그 연유는 어떤 것인가? 평소 말하는 무위의 건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러한 건축적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방철린: 건축은 설계하는 사람 입장에서 욕심을 내기 쉬운 직업이다. 건축설계를 새로 수임 받을 때면 뭔가 새로운 근사한 집을 설계해 보겠다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계에 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설계를 젊었을 때부터 계속 해오다 보니까, 문득 설계된 내용에 건축가의 욕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건축가의 욕심은 다 털어버리는 대신, 새로 지어지는 건축에 의해서 도시나 자연이 갖고 있는 에너지들이 변질되지 않도록 유지해 주는 것이 우선 가져야 할 건축가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렇게 지은 집은 우선 그 앉음새가 편안할 것이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나름의 쾌적함과 편안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건축가 자신이 다 털어버리고 건축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건축주건 건축가이건 대개 돋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적인 욕심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땅이 있어야 집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 땅이 하는 이야기에 주목하고 땅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건축은 여기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방 소장이 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출발 자체가, 그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데서 비롯되는 정체성을 통해 이미 땅을 보는 관점이 우리화 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수 있겠다. 서양건축은 땅에서 출발을 해도 대지, 위치 선정 등에서 공간 점유 방법이 확연하게 바꾸어지는 다이어그램을 많이 쓰고 있다. 하지만 근래 서양건축에서도 환경 문제에 봉착해서 땅을 건드리지 않고 작업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본질적인 그들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현재의 환경 이슈에 대한 방법론으로서 관심을 갖는 쪽인 것 같다. 한편, 우리나라 건축은 옛날부터 친환경적이며 그것을 차용하면서 발전해왔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환경 문제의 측면으로서보다는 풍수나 샤머니즘을 통해 땅을 존중하는 사상에 원초적으로 지배되어 있었기에 선조들이 땅과 조화가 되는 건축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따라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정서를 논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자꾸 묻는 세태 -그것의 생산성, 이점에만 관심을 가지는 풍토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관념이 건축을 통해 보존될 때 그것이 바로 한국적 정신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관념적 건축이 우리 시대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오직 생산성만을 생각하고 사상과 서정을 경시하는 경향은 이미 서양적인 사고방식이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의 몸과 세습되어 온 우리 고유문화 사이에 자꾸 모순이 생긴다. 건축은 서비스와 사회적 이슈를 던져줘야 하는 거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단지 이성적으로만은 설득할 수 없는 감성적인 설득력을 갖는 건축도 있을 수 있다. 방 소장의 작품은 '불확정성', '어반 보이드(urban void)' 같은 단편적인 설득보다는, 이렇듯 '보아라, 땅이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단순한 출발, 관념적 당위성이 많이 읽혀진다. 예를 들어 <원주제일교회수련원>이나 펜션하우스인 <태봉리 산빛마당>(이하 산빛마당)은 건축 자체의 아름다움으로써 보다는, 사람들이 그 곳의 땅이나 경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이렇게 건물이 지어질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끔 설득한다.
언급한 바와 같다. 서양에 가서 건축과 도시를 보며 느끼는 것은 그 위용이나 번듯한 형태, 입면들이며, 역사적으로도 서양건축은 그러한 사고로 지어져왔다. 그런 것을 보고 나는 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우리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수주의를 내세우려하는 의도가 아니다. 객관적인 비교를 해보니 우리의 것이 더 상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을 생각하고 건축이 여기에 어우러져 일체감을 갖게 하는 것이 서양건축보다는 더 우위에 있고 깊이가 있다고 느껴왔다. 안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감성적으로 더 평온하고 우쭐댐 없이 겸손해지며, 자신을 자연 혹은 도시 속의 한 요소로서 인식하게 하는 건축 - 이런 건축이라야 진정 인간세계에 존재 가치가 있는 건축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을 해본다. 건축가가 자기 자신을 버리고 건축을 하겠다는 생각이 건축 속에 숨겨져 있어, 그 건축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세계를 바르게 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관념적이냐 아니냐, 시각적이냐 아니냐는 두 번째 문제이다. 가령 팔라디오(A. Palladio)의 <빌라 로툰다>에 사는 사람들은 우월감을 느끼며 살지도 모른다. 언덕 한가운데 보란 듯 올라서 있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표정과 자세가 얼마나 교만스럽고 도전적일까 상상이 간다. 하지만 그런 것이 과연 건축가가 건축주에게 해 줄 노릇일까? 건축가들이 중요하게 여기고 다루어야 하는 것은 관념적인 이야기 이전에, 자신이 설계한 집에 살 사람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관심을 가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욕심을 함께 버리는 것이 좋은 것이며, '무위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집이 하나의 계급을 나타내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빌라 로툰다>를 빌어 말한 점에 공감한다. 요즘 사람들은 집의 '정주성' 등을 따지기 전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또 다른 자본가치로써 집을 구입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 집에 편해서 산다는 'dwelling'의 개념보다, 내가 이런 집에 산다는 것을 헤게모니로서 보여주려는 것이다. 특히 서양식 건축에 사는 데에 우월감을 느끼는 우리나라의 이 같은 헤게모니는 구한말 무렵 수입된 것이라 안타깝다. 한편, 영국의 경우는 피어스 거프(P. Gough) 같은 건축가가 영국 국민들에게 현대 건축가들이 지은 새로운 형식의 집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영국인들이 ― 그들이 물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 빅토리안 양식의 옛 집들도 여전히 살기 좋고 편한데 굳이 바꿔야 할 필요가 있냐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인상 깊었다. 그들은 그런 식의 전통 보존을 통해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방 소장은 거주에 대한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그 집이 자본주의적 계급이 아닌 또 다른 문화적 인프라가 있는 계층이 머무는 곳이 되도록 하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자신이 좀 특별한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지향하는 방향과 그 내용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일 수 있다. 나를 찾아오는 건축주는 대부분 나의 작업 내용을 여러 루트를 통하여 미리 파악하고 온 상태이기 때문에 거의 비슷한 수준의 디자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행할 수가 있다. 계획이나 디자인의 주를 이루는 어휘들이 이야기되는 동안에도 건축주와의 이견의 폭이 적어서 대화를 통해서 쉽게 조정을 해 나갈 수 있다. 설사 전혀 다른 이견이 있다 해도 서로의 설득으로 방향을 잡아나간다.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부류의 주택이 있겠지만, 이런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은 특별하면서 품위를 지킬 수 있고, 뛰어나 보이지만 맑고 깨끗함을 유지시킬 수 있는 그런 집을 꿈꾼다. 나는 늘 건축주에게 설계한 집이 그렇게 호화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호화롭기보다는 정신이 머무는 차분한 집이 더 좋지 않을까라고, 돈만 많은 갑부가 사는 집보다는 넉넉하고 품위 있는 선비다운 집으로 유도한다. 쉬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도 건축가들이 건축주를 이런 방향으로 유도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 가서 보면 좋은 것이 있는데 그걸 소화해서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는 건축주들이 있다. 물론 나는 가급적이면 다 가본다. 건축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을 하기 위해서다. 그것을 소화해서 나의 건축 언어 속에서 건축화 할 수 있는 내용이면 받아들이고, 디자인의 정신이 전혀 다를 경우는 나의 건축이 지향하는 방향을 설명하면서 건축주의 생각 중에서 건축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설득한다. 그렇게 해서 건축주들이 나의 생각을 따라주게 되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결국 우리 것에 공감하게 되는 일은 국가적인 무조건적 계몽에 의해서보다, 방 소장과 같은 작업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굳이 우리 것 남의 것을 구별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의 감성에 맞게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고, 또 그것이 우리한테 익숙하고 유익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현대건축에서 이롭게 발전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외래문화 역시 쉽게 우리의 정서에 적응되어 우리화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이 어우러져 바뀌고 변천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어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단지 나의 가치 있는 좋은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남의 떡에 두는 관심이 문제이다.
때로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문화란 그대로 있는 것 자체이며, 만들어지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는 것이 모두 문화의 일상적인 현상인 것이다. 방 소장의 건축은 이렇게 사람의 있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문화의 현상적인 측면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고민은 특히 공간 작업에서 마당이 많이 표현되는 가운데 발견된다. 현재, 지금에 있어 마당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큰 요소이다.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인해 그 공간이 중심이 된다. 그 안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든 안하든 간에 정신적인 중심으로 작용한다. 또한 마당을 지나는 시선을 통해 마당을 둘러싼 공간들은 서로 건너편에 있는 상대방들을 느낄 수 있다. 결국은 전체를 하나로 묶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시선이란 재미있는 단어이다. 내가 보는 것도 시선이지만 내가 보임을 당하는 것도 시선이다.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한 것인가?
그렇다. 아내가 건너편에 있는 남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고, 남편도 부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함으로써 서로 보이지 않은 교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아파트 평면을 보면 거실이 중심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거실을 떠나면 바로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공간도 없이 바로 각 방들로 연결되는데, 각 방들과 거실사이의 문을 닫고 나면 전부 남의 세계가 된다. 집안 식구들끼리 얼굴 보기 어려울 정도의 사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열려져 있는 마당과 그 주변의 개개의 생활공간들이 서로를 더 느끼게 하고 연결시켜줄 수 있다.
거주 방식을 배려한다는 측면도 있는가? 가령 마당이 있는 집에 서양 사람들이 산다면 바비큐 파티를 여는 등 그들 나름의 문화적 방식대로 사용할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식 집에 산다면 파티오(patio)에 천막을 치고 상을 치루는 장소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집이란 형상,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써 사용하도록 하나의 잠정적인 터를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당 역시 이처럼 각 문화에 잠재된 삶의 거주방식을 존중하고 드러내주는 방법으로써 현재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예전 농경 사회에는 집안 식구들이 모이는 일도 많았고, 제례 등의 전통 행사를 비롯한 마당의 쓰임새도 상당히 다양했다. 추수한 곡물들을 정리하는 일, 장작을 패서 부엌 옆에 쌓아놓고 겨울을 지내는 일, 그리고 관혼상제 행사 등을 위해 온 동네 식구들이 마당을 이용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물론 손님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 수도 있겠지만, 그런 행사는 가끔 있는 일이다. 현대에는 거주자들의 상호간 의사소통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마당은 이렇듯 식구 서로 간에 외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일 수 있다. 즉, 심미적인 의미로써 보다는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가정이라는 집단을 영위하는데 정신적으로 유익한 요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가족 구성원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마당을 통해 다시 치유해준다는 것인가?
그렇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하늘마당'과 같은 실제 프로젝트에서 건축주를 통하여 확인된 사실이다.
도시 내에서도 건축 작업을 많이 했는데, 도시적 현안에 대해서는 방 소장의 건축관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처음 이야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어떤 건축을 하건 외부에서 그 집이 어떻게 보여 지느냐 보다는 도시나 자연 속에서 어떻게 앉혀지느냐 ― 즉, 그 집의 태도에 관심을 갖고 도시에 걸 맞는 집의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건축의 프로그램이 어떠하든 그 건축 내에 있을 사람들의 행동이나 행위에 관심을 갖고 이들의 행동이나 행위를 어떻게 담아 줄까를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태계획은 특별히 따로 구성하기보다, 앞서 이야기한 도시를 생각하는 마음과 건축 내부의 행위에 의해서 구축되어진 틀에서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진 것으로 보고 이를 최대한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마무리한다. <산빛마당>에서도 주인 세대와 객이 와서 자는 공간을 구분하면서도 관계를 갖도록 설정하고, 그 쓰임새도 다르게 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원주제일교회수련원>의 경우는 그 안에 일어나는 행위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이에 '펼쳐진' 건축적 배치를 가져야 다양하고 많은 행위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집 내부에서 모든 행위가 일어나고 종결되며 현관 밖으로 나서면 또 다른 외부의 행위가 별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구분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외부와 내부가 늘 공존하면서 생활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아무 데나 나갈 수 있는 문 혹은 창문들이 곳곳에 있어서 내외부가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곳들을 계획했다. 중심에 배치한 마당 주위에 수련원의 주요 활동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들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그 장소가 상당히 유용하고 가치 있게 쓰일 것이다. 야외 뷔페 같은 비정규 행사는 물론, 신도들이 예상 외로 많아져 식당이 비좁아질 경우 밖으로 나와 이 마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많은 신도들이 모였다가 나갈 때 홀 면적이 부족해지면 마당으로 뚫고 나가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신도들이라는 카테고리가 있긴 하지만 그 연령이나 부류 그리고 수에 있어서 먼 장래까지는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런 행위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의 개념을 갖는 장소로서 해석을 하였다.
시간성을 예상하고 구상했다는 말인가?
건축가가 한 방향을 정해서 이 집은 이렇게 쓰여야 한다고 설계하기보다는 ― 종종 건축가와 건축주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만큼 ― 그 곳이 다르게 쓰여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회자되는 '결정하지 않는 프로그램', '불확정성' 개념과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한 건축물이 오래 견디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요구 조건에 변모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만 만들어주는 것도 현대 건축가들에게 필요한 또 다른 태도가 아닐까?
맞다. 더군다나 시대가 워낙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만큼, 건축가들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축이 도시에 많을수록 도시는 풍부하고 여유로움이 있어 시민들에게 마음의 풍요를 제공하고 건축 또한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건축가들도 있는데, 렘 쿨하스(R. Coolhaas)의 경우는 불확정적인 요소들을 미리 결정해서 다이어그램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해결안을 제시했다. 국내 건축계의 문제는 그러한 외국 건축가들의 이론이 그 좋고 나쁨을 떠나, 검증도 없이 들여와서 자기 나름의 해법을 마구 풀어헤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맞고 안 맞고를 따지지 않고, 그 이론의 브랜드 네임만을 차용하여 건물을 짓고 그것이 해결을 주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 건축가들은 마치 우리의 문제점이 서양 이론의 헤게모니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같은 유행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걸 맞는 상황인지 외국의 갖가지 건축 사조들이 최근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국내에 상당히 많이 보급되고 있다. 특히 외국에서 수학을 하고 들어오는 젊은 건축가들이 들여오는 새로운 사조들은 국내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이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일시적인 혼돈의 현상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이러한 이론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려면, 단편적이거나 편협된 생각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며 적절한 검증과정을 거쳐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이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도들이 이러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고 편협된 유희에 머무는 것이라면 일회적인 시도로 끝날 수 있다.
걱정되는 것은 이러한 외래 건축문화가 전문적인 건축가 집단에 의해 수입되지 않고 일부 건축주들의 감각적 취향에 따라 수입되는 경우이다. 전문 건축가가 말하는 방법이 희박하기도 하고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
감각적 취향에 의한 것이라면 건축가가 개입된 문제와는 별개라고 본다. 이런 경우 그 담당 건축가가 설득으로 처리해야할 문제가 아닌가? 건축가 자신이 건축에 소신도 없이 건축주의 감각적 취향을 쫓아다니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커피를 마시는 서양 문화도 우리 방식대로 마시면서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 외래문화가 시간을 통해 허용력 있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 것이 되고, 감각적 이벤트로 그친다면 곧 사라질 것이다. 결국 외래문화라는 것이 지역성의 고착문화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을 때 그 것의 생명력이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원주제일교회수련원>과 관련하여, 지역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가? 종탑과 빨간 십자가가 우리나라 교회의 아이템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교회를 통해 신성함을 찾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해줄 수 있는 우리만의 조형적인 언어는 무엇일까?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의 우상론들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 신이라는 존재도 결국에는 실제 경험적 존재라기보다는 믿음과 언어, 그리고 감성에 의해 형상화될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신을 느끼는 형상의 감성도 결국 문화의 한 일부분이다. 이른 바 신이라는 무형의 존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지하게 해 주는 것, 즉 이미 있는 그대로를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신의 형상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세습되어 온 지역문화마다의 인간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비유컨대 하나님이 백인이라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고딕양식의 건축 조형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인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신'일 뿐인 것인데 말이다. 서구의 교회건축은 웅장함이 신을 느끼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안도 다다오(安蕂忠雄)의 <빛의 교회>나 <물의 교회>에서 보듯, 일본 교회들은 또 그들 나름의 감성을 가지고 신에게 접근했다. 우리나라의 몇몇 교회 작품들도 신성에 대한 감성과 시적인 부분을 풀어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원주제일교회수련원>에서는 이 같은 고민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기도를 통해 신과 대화를 하기 위한 장소는 웅장함과 화려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신과 내가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선 먼저 아무 잡념이 들지 않게 만드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 맨 처음 카타콤(Catacomb)에서 시작된 서구의 교회도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교회건축이 건축의 대표성을 지닐 만큼 화려하게 성장하면서 변질된 부분이 다소 있는데, 이는 어쩌면 교회 건축이 잘못 가고있는 방향일지도 모른다. 단아하고 조그맣고 어머니 품 같은 분위기가 진짜 교회의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교회와 종교인들도 신도 수 증가만을 초점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신도들이 신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 <원주제일교회수련원>은 수련원이기 때문에 종교 공간이지만 순수한 교회와는 또 틀리다. 수련과 더불어 다 같이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하므로, 한 공간 안에 이러한 측면들을 어떻게 해결할 지에 대해 신경을 써야했다. 그래서 마당을 설정한 것이다. 이 곳이 단순히 조용한 공간으로만 남기보다는 축제 분위기를 갖는 복잡한 공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회에서 빛의 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민했나?
자연의 빛에는 생명력이 있다. 조명 기구에서 나온 빛은 예쁘게 보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인공적인 빛에는 감정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기후의 변화에 따라 밝고 어두워지며, 황혼녘의 빛처럼 시간에 따라 달라지면서 세상을 느끼게 하는 자연의 빛이 곧 살아 있는 빛이다. 그러한 빛을 통해 교회를 비춤으로서 신도들의 감성이 좀 더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에 <원주제일교회수련원>에서는 자연의 빛으로 충분히 교회의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디자인하여, 대예배실과 소예배실 모두 조명 기구를 켜지 않고도 측면 빛을 통해 실내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하였으며 특히 대예배실의 경우 전면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이 중심성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원래 함께 의도했던 천창 계획이 교회 측의 반대 의견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런데 빛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강렬한 빛을 싫어한다. 발코니를 만들어놔도 나가질 않고 오히려 막는다. 유럽 사람들은 빛이 부족해서인지 빛을 향해 나가려고 하고, 발코니에서도 뜨거운 볕 아래 일광욕을 한다. 서양 건축가들 또한 루버나 캔틸레버 없이 빛을 많이 받아들이는 건축을 설계한다. 반면, 우리는 빛을 많이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지 크게 빛을 받아들이는 개구부를 만들어놓고도 결국 차양 등으로 막아버린다. 볕이 잘 드는데도 거실의 인공조명이 우리나라 같이 밝은 곳도 아마 없을 것이다. 자연의 빛을 잘 누릴 수 있는 전원주택에서조차 아파트처럼 조명을 설치하지 않는가? 확실히 빛을 느끼는 방식도 환경에 지배받는 정서의 일종인 듯 하다.
빛에 대한 잘못된 인식 탓도 있을 것이다. 주택이라면 될 수 있으면 모든 방이 남향으로 면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채광과 무관하게 인공조명을 선호한다. 자연광의 신비함에 대한 계몽이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산빛마당>과 같은 펜션하우스는 앞으로 주 5일 근무제와 더불어 확산될 수 있는 전원주택의 형태로도 파악할 수 있다. 더불어 전세 및 렌트도 가능하여 다양하게 쓰일 여지가 있는 형태로서, 또 다른 새로운 문화로 확산될 것 같다. 교외 전원주택으로서 펜션하우스가 가질 패러다임에 대해 말해 달라.
사실 건축주가 <산빛마당>을 의뢰하기 전까지는 펜션하우스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소하였다. 보통 이야기하는 민박 집과 무엇이 다르길래 그렇게 부를까 하는……. 그러나 결국 이 역시 전원에 있는 주택과 같은 개념이라면, 손님들을 초대하여 묵어갈 수 있도록 하는 객실부분과 주인 세대가 생활하는 주거를 병치시킨 형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전원에 위치하므로 덩어리로 뭉쳐진 공간 형태보다는 넓게 펼쳐져서 각 동들이 그룹을 이루어 외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주인 세대와 게스트 동간의 프라이버시는 마당의 깊이를 이용하여 보호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어떤 사람들이 주가 되는가? 건축주의 개인적 기호성에 따라 작가가 선택되는 경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경향을 어떻게 끌어가는가가 또한 건축가 전문 집단의 몫인 것 같다. 즉, 건축 작업 외의 작업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축주가 어떤 건축가의 건축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해 의뢰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좋은 건축들에 대한 정보가 일반 건축주들에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건축물이 오픈할 때 홍보 기획의 시나리오도 계획하는 등, 보다 좋은 건축물의 존재를 알리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일부 계층의 관념적인 전유물로서가 아닌 대중적인 건축의 형성이 가능하리라 본다. 특히, 방 소장은 여러 세입자들을 고려해야 하는 다가구주택을 많이 설계했는데, 이러한 대중화의 문제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대개의 건축주들은 보통은 간접적인 소개를 통하거나 인터넷의 건축 관련 사이트나 건축 관련 서적을 통하여, 그리고 건축물을 직접 보고 물어물어 사무소를 찾아오기도 한다. 이렇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작가에 대한 정보와 작품에 대한 성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기 때문에 건축물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향의 디자인을 제시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실 좀 부족하다면 홍보를 적극적으로 못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건축주 스스로 찾아본 결과에 의해 소극적으로 설계를 수임 받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집을 설계할 때는 우선 그 집에 살 사람이 누구인가 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하고 이들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질까라는 실제성을 면밀히 배려하다보면 이들의 생활에 정말 애절하게 필요한 공간을 신경 쓰게 되고, 이러한 점이 집이 완성되더라도 실제 입주한 사람 간에 회자되면서 그 장단점이 이야기된다.
이미 건축주들은 다가구주택을 집이 아닌 교환 가치, 마케팅의 목적으로 보고 있다. 즉, 사람들은 정주성보다는 가격에 맞는 세입 문제를 더 따진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건축가들은 거기에 편승하여 평면을 수정한다.
사실 다가구주택을 경제적 가치는 부동산의 주도하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들 부동산들은 땅이 있으면 먼저 가설계(규모검토를 이들이 이렇게 부름)를 만들고 건축비를 산정하여 그 동네의 임대 상황을 감안해서 땅값과 집세를 결정, 그 안에서 공사가 진행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건축주에게 말을 해버린다. "당신이 집을 지으려는 이 땅에는 몇 평짜리 집이 나오고 세는 얼마이다. 그래서 얼마의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그 금액이 문제가 된다. 부동산이 정한 이 금액 수준에는 허가만을 위한 개략설계비용과 수준이 떨어지는 공사비로 산정된 것이기 때문에 건축주가 이 정보에 솔깃해 있는 상태에서 그래도 조금 좋은 집을 지어보겠다고 설계사무소에 오면 설계비며 건축비며 듣던 것과는 다르게 되고, 그러니 머릿속에 생각한 이익금이 줄어들게 된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찾아와 생각을 고치는 사람들은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는 것이고, 반면 부동산 쪽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쪽에서 이야기한대로 건축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 집단들은「프로그램 기획 측면에도 폭넓게 참여하는 일이 절실하다. 입주자를 위하는 동시에, 기획을 통해 건축주의 이익도 고려해줄 수 있는 건축적 방법을 먼저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런 건축의 프로그램의 기획에 대해서도 이제는 건축가 전문 집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근간에 확산되고 있는 고시원이라는 프로그램은 일종의 도심 내의 서민주거 형태라 할 수 있다. 일종의 도시 사글세방이다. 그런 고시원을 증축하려는 건축주의 요구 조건은 당연히 수익 창출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건축가가 무조건 정주성 운운하며 좀 더 넓은 방, 쾌적한 환경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하지만 또한 반면에 그렇게 계획해주는 것도 건축가의 의무이다. 따라서 정해진 예산 아래에서 무조건 형태와 건축으로만 고민하기보다는 일종의 프로그램 기획으로 그것을 대처할 수 있다. 유럽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컨셉 하우스(concept house)'는 정해진 예산 아래 풀어내는 주택 현상설계로 그 이름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저예산이지만 보다 쾌적한 고시원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건축가의 디자인적인 가치이다. 이를테면 고시원 방 2개 정도의 공간 면적을 이용하여 현관 로비에 '라면 바' 같은 것을 만들어주면, 건축주는 그 라면 바를 세입자에게 임대함으로써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세입자들은 라면이라는 아주 일상의 프로그램에 대해 서로 순번을 정해 일일 라면 바를 운영하며 자투리 수익을 남길 수도 있으며, 이는 단절된 고시원의 커뮤니티에 밝은 웃음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로비공간을 안겨줌에도 단순히 공간으로서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프로그램의 기획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처음에 다가구주택에 손댔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한 다가구주택을 반(半)지하실을 가본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 다가구주택들이 대다수란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다가구주택을 짓겠다는 건축주가 나타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이 연결되어 몇 개의 작업을 더 하게 되었다. 김 교수의 지적같이 건축주와 입주자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의 건축적 모색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방철린 하면 다가구주택 전문가처럼 되어버린 감도 있다. 아무튼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입주 예정자들이 시공이 끝나기 전에 찾아와 보고 먼저 가계약을 하기도 했는데,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 집이 누구한테라도 넘어갈세라 매일 와보는 입주 예정자도 있었다. 건축주들에 의하면 여타 건물과 달리 지하에 마당도 만드는 등의 다른 분위기에 세입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아마도 여태껏 이야기한 주된 내용은 '한국성', '한국적' 등과 같은 일반적인 논란이었던 것 같다. 수도 없이 이야기되는 건축의 한국성, 정체성 문제들……. 방 소장의 건축이 한국성이라는 말과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한국성을 논하는 데 어떤 피해 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을 없잖아 볼 수 있다. 혹자는 한국적이란 것이 없다고 역설하며, 서구화된 도시의 형상에 자괴감부터 느끼는 어조로 그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일부는 유달리 한국적 공간을 재생산하기 위한 노력에 강박화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러한 보존의 가치가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한국적 가치의 재생산에만 몰입하기보다는 한국적 가치의 재발견이라는 점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그 형상이 변모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세습된 우리의 정신적 가치는 결국 잔존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건축물을 보고 '단아하다'고 느끼는 정서와 감성은 한국적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우리의 건축을 보면서 그들이 대해보지 못한 그러한 '단아하다'는 정서 - 표현하지는 못 할지라도 - 그 엇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서양인은 그 감성의 공간에서는 한국적인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러한 한국의 정서가 우리의 것이 아니겠는가? 즉, 한국성이라는 것은 사람과 건축이기보다는 그런 '단아스러움'이라는 우리만의 감성과 정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반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형태의 한국적 강박성보다는, 우리 정서의 치유와 발견이 이루어지는 건축이 바로 한국성을 연유하는 또 다른 하나의 한국건축의 정체성이 아닐지. 정통성의 문제를 한국적 건축에 결부시킨다면 결국 원조 따지기 밖에 안 된다. 아마도 그러한 피해 의식들 때문에 그 동안 우리는 한국적 건축에 대한 힘 있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시들함을 보여주지 않았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래서 방 소장의 건축은 한국적 전통에 고무되어 있는 공간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대한 문제로 읽을 수 있는 시나리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서의 문제가 어떤 거주 방식으로 승하고 있는 지를 연역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대담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것이 혹여 진부할 수 있는 한국성이라는 의제를 반복한 연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방 소장의 집들이 보여주는 것들이 결국 한국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상건축(ideal architectire)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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