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철린 건축가가 9월 25일에 C&M cableTV에 출연한다. C&M(씨엔엠)텔레비전방송은 2009년 9월 16일 오전 건축그룹칸 사무실에서 "김민호의 사람이야기"의 오는 9월 25일 방송분의 대담촬영을 마쳤다. 이날 촬영은 한 시간가량 진행되었으며 방송은 50분 진행된다. 방철린 건축가의 건축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방송시간 2009년 9월 25일 금요일 오전 8시 오후4시, 재 방 송 토요일,일요일 오전 8시/오후4시/밤10시 월요일 오전8시/오후4시
이필훈: 방철린 소장의 건축 작업은 공간건축을 거쳐 정림건축에서 10여 년 간 다양한 경력을 쌓은 시기, 이후 독립하여 4.3그룹 동인으로서 활동한 시기, 현재 50대 이후의 세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본인의 건축적 사고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혹은 어떠한 항성이 있는가?
방철린: 공간건축의 고(故) 김수근 선생 밑에서 일하면서 건축의 본질적 문제를 고민했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건축 수업을 받기 힘들었던 시절, 건축은 단순히 기능을 풀고 형태 디자인 작업에 그치는 것뿐이 아니라 공간의 체계라든가 질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건축은 어떻게 풀어 나아가야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였다. 당시 청년기에 감수성이 강한 시절에 받아들였던 건축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초가 되어 지금도 그 영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정림건축에서 활동할 때도 이러한 고민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 때에는 건축에 대한 깊은 탐구보다는, 주로 다양한 프로젝트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의 응용을 추구하고 폭을 넓히는 시기였다. 십여 년 동안 엄청난 양의 다양한 일을 하였다. 4.3그룹 활동은 젊었을 때부터 고민해왔던 생각들이 소신 있게 정리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으로, 대형사무소에서 찾기 힘든 ‘나의 것’을 정립할 기회였다. 상당히 많은 양의 일들을 해오면서 갖게 된 건축에 대한 많은 사고들을 선별하고 정리하여 자기화 하는 시기였다. 또한 시대에 대한 감각이 성립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동인 멤버들도 모두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4.3그룹 활동이 시작 되었던 1990년도의 3, 4년 이후에 지어진 작품들과 그 이전의 것들은 동인 모두에게서 그 차이가 나타난다. 이때부터 인토건축으로 독립하면서 자기 찾기에 나섰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형사무소 때보다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타성에 젖지 않고 정리를 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며 심혈을 기울여 작업할 수 있었다.
이필훈: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건축한다’라고 건축관을 천명하는 건축가들이 있다. 방철린 소장도 그러한 건축관을 천명해온 연배에 속한다. 그런데 오늘날 건축계 리더들의 건축관이 비슷한 색채로 물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4.3그룹 활동을 건축가의 자아성찰의 확립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한편으로는 당시 동인활동을 주도하는 동료 사이의 사고가 비슷해지거나 작품이 비슷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았는가?
방철린: 의도하진 않았으나 개인적으로 놀랐던 일이 있다. 예전에 특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대학 교수가 내 강의 내용이 같은 4.3그룹 동인인 S씨의 논의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시간이지나고 S씨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과연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내 경우 서양의 건축을 신전-팔라조-사보아주택의 계보를 통해 살펴보면서 한국건축과의 차이를 비교했었다. <충효당>을 예를 들어, 신전의 평면과 입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양건축과는 달리, 환경과의 밀착관계를 유지하고 공간을 주로 다루며 다양한 경관과 접함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건축의 장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데, 4.3그룹 활동 당시 같이 여행을 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하긴 같은 직장에서 있을 때부터 비슷한 문제점들을 고민했었기 때문에 느끼고 추구하는 것이 유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건축가로서 먼저고 나중이고 간에 당연히 남과 똑같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사실 독자적인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거꾸로 비슷한 사고의 건축가에 대한 글을 가급적 접하지 않고자 해왔다.
이필훈: 파주 프로젝트를 돌아보면 작은 집들이지만 열린 소통의 공간을 만들려는 노력이 보인다. 집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방철린: 건축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무위(無爲)’이다. 환경에 걸 맞는 장소를 선택하고 집을 배치하는 데 제멋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이것이 아주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조상들의 정신에 배인 얼이며, 그런 생각이 좋은 도시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라 생각한다. 루이스 칸도 같은 이야기를 언급하였는데 충분히 공감한다. 또한 건축에서 ‘허(虛)’란 무엇인가를 늘 생각한다. 아날로그 시대를 벗어나 디지털 시대로 치닫고 있는 요즘 느끼는 문제는 ‘인간상실’이다. 디지털세계에서는 라이프니츠가 만든 2진법을 사용하지만, 동양에서 더 먼저 아날로그적 2진법을 썼다. 바로 ‘양음(陽陰)’이다. 서양과 동양의 이진법 개념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동양의 이진법의 양음은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서양의 디지털 이진법은 있고 없음,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동양의 이진법이 공존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서양의 디지털 이진법은 ‘제거가 아니면 선정’의 개념이다. 사소한 허물도 인정되지 않는 현대 서구식 이분법적 사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아날로그적 요소가 건축에 있어서 ‘허’의 요소가 아닐까 한다. 기능성, 필요성을 떠나 있음 자체로써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갖게 하는 공간을 추구하고 건축에 제공해 줌으로써 현대의 각박한 심성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본다.
이필훈: 말씀하신 ‘허’는 한자 그대로 비어있음이라기 보단, ‘비기능적인’, ‘의미 없는’, ‘여유로운’ 등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방철린: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 그것들을 완전히 비워내고(虛) 조용하게(靜) 만든 상태를 노자는 ‘허’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곧 근본(根)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도(道)라고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에는 모든 것에 ‘허’가 있으니 자연에도, 도시에도, 건축에도 ‘허’가 있다. 건축의 ‘허’는 기능적으로는 꼭 필요한 공간이 아닌, 그러나 인간의 근본을 찾아주고 인간본연의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어찌 보면 이필훈 소장이 이야기하는 ‘의미 없는’ 공간으로 느낄 수도 있고 공간의 ‘여유’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간을 추구하고 만들어내야 진정 인간이 주인이 되는 좋은 건축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필훈: 설계할 때 주제 외에 많은 소재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어떤 것들이 있나?
방철린: 허, 무위의 논의도 중요하지만, 일단 집은 재미있어야 한다. 건축의 깊은 논의거리는 될 수 없을지언정,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필요하다. 아무리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진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더라도, 그것만으로 부부생활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 농담도 하고 깜짝쇼도 해야 생활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건축도 그런 유머러스한 부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필훈: 집이 재미있고 풍부해야 한다는 말씀은 의미가 있다. 같은 설계자 입장에서 보면 건축가가 어떠한 거대 담론, 새로운 건축관이나 사상을 굳이 만들려 하는 것, 시대를 정리하여 사상을 만들어내고 건축으로 그것을 표현하겠다는 행위가 치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설계를 하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내가 세워놓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들의 발생이 집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건축가들이 그 간극을 인정하는 게 어떨까. 건축관이 매우 뚜렷하여 그 개념으로만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 외에도 건축 기술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많은 장점들이 있는데 인문학적인, 형이상학적인 논의에만 그쳐 그 집이 갑자기 재미없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방철린: 말은 쉽지만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생활의 활력소로서의 유머는 늘 필요한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하듯이, 건축에서도 마찬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과학사> 중앙 정면은 단단해 보이는 담과 문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대문은 사실 양쪽에서 튀어나온 벽체 캔틸레버가 서로 맞보고 있는 모습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중정 한가운데에 있는 물, 그리고 이곳에서 2층으로 오르는 캔틸레버 계단 등은 예상을 깨기에 충분한 요소이다. 또 3층 난간 바깥으로 나온 캔틸레버도 아래에서 볼 때 궁금증을 유발한다. <북이십일> 출입구 상부의 캔틸레버 구조나 벽으로 막힌 4층의 발코니, 3, 4층 외부로 튀어나온 계단 등 역시 보고 그냥 넘기기에는 평범한 형상은 아니다.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한국가드너사의 <탄탄스토리하우스>에서도 이런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더 많은 유머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필훈: 몇 년 전에 외국의 건축가 포럼에서 제임스 스털링의 스투트가르트 미술관 설계에 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창호가 돌을 빼내어 만든 것 같은 디테일로 되어 있고 그 밑에 빼낸 돌이 쌓여져 있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학생들의 질문에 쌓아놓은 돌만 진짜고 나머지 벽에 붙인 돌은 건식으로 붙였기에 다 가짜라고, 그래서 그걸 풍자하고 싶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축가 선배님들이 꾸준히 전통건축의 한국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무거웠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에 대한 이해도 절제와 풍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전통건축을 갈 때 굴뚝과 담, 계단을 많이 보는데, 선비가 어떻게 지으라고 말하지 않는 부분에서 건축쟁이 맘대로 한 부분이 자연스럽고 재미있다. 심각한 유교적, 불교적 이론에 의한 집의 전체 구조와 자유로운 정신으로 만든 디테일이 모여 대비적인 풍부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해외에서 돌아와 우리나라 전통건축을 둘러본 어느 건축가가 돌계단에 새겨진 원숭이의 미소를 보며, 누가 따로 지시하지 않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그와 같은 해학에 흥미를 느낀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전통건축에는 이처럼 절제된 아름다움도 있지만 그 아래 굉장히 풍부한 자연스러움, 농담, 재미가 있다. 그러한 이중적인 코드를 집에 만들고 싶다는 방철린 소장의 생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필훈: 아시아 건축들을 들여다보면 한국 유명 건축가들의 집은 아시아의 다른 건축가들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원류는 유럽이나 일본의 유명건축가로 읽혀진다. 작가적 특성과 토속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작품들은 오히려 디자인이 안 된 것 같으면서도 갖춰야 할 바를 제대로 갖춘 집들이거나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 뛰어난 집 그리고 주변의 지역적 상황과 잘 어울리는 집들이다. 파주의 프로젝트를 답사하면서 방철린 소장의 집이 편해졌다는 느낌을 가졌다. 무위의 표현 방식이 될 수 있겠지만, 집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강박관념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칙에 충실한 집들이다.
방철린: 감사한 말씀이다. 청년기 시절 공간건축에서 오피스 디자인을 위해 책 한권 될 만큼 많은 입면도를 그려 김수근 씨에게 보여주고 그 중 한 개를 선택 받은 적이 있다. 정림건축에서도 13년 동안 굉장한 스피드로 올라운드 플레이 작업을 해나가며 많은 종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였고 그러면서 디자인에 쏟아 부은 정성도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이 충효당이나 양진당 같은 한국건축에는 독자적인 입면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면에 대한 집착보다는 그 집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 더 중요하고 자연과의 관계 사람을 위한 공간 만들기가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 <미제루>를 디자인 할 때도 집 몇채 되지 않는 전원 속에 있어야 하는 이 집은 가급적이면 나를 없애고 그 동네에서 편한 집을 만들어주는 것이 최상이라 생각했다. 처음 거실을 배치시켰던 부분에 창을 없애고 이 장소를 루(樓)로 만들어 자연의 냄새나 벌레소리와 직접 관계를 맺도록 했다. 진정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만 만들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러한 공간 구조는 동네사람들과의 연결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어떤 건축가들로부터 집이 후줄근해 보인다는 소리도 들었던 이런 건축이 아카시아(ARCASIA) 건축상 금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아카시아 측의 이메일을 받았을 때 나 자신도 적잖이 놀랐었다.
이필훈: 아시아의 많은 건축가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우징을 위해 참여하고 있다. 평당 공사비가 낮기 때문에 좋은 집을 못 짓는다는 한국 건축가들의 생각은 말이 안 된다. 공사비에 맞는 좋은 집을 지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다. 이런 것에 상관없이 건축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프로토타입만 계속 그려내어 건축주에게 무조건 받아들이라 하는 것이 문제이다. 잡지에 내기 위해 짓는 집, 잡지 건축의 문제이기도 하다. 설계하는 집을 통해 건축가의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그 집을 소유하는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방철린: ‘사’자가 들어간 다른 전문가 집단과 함께 심도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한때 저소득층이 사는 다가구주택에 관심을 쏟은 적이 있지만, 변호사건 의사건 저소득층을 위한 일에 뛰어드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듯이 건축 또한 마찬가지이다. 건축가의 자질에 관한 문제라고 보는데, 건축가의 욕망이라는 게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가, 건축가가 진정한 건축의 본질을 찾고 있는 것인가를 실험할 기회가 된다고 본다. 할 수만 있다면 이쪽의 관심은 좋은 건축가를 그리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코스라 생각하고 또 이를 위해 실천적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 프로젝트>
이필훈: 현장에 자주 가는 편인가?
방철린: 일주일에 한번 정도 현장엘 꼭 간다. <북이십일>과 <교육과학사> 공사 중에도 가급적 최선의 결과물을 도출해 내기 위해 파주에 자주 갔다. 건축물이 일단 지어지면 더 이상의 수정 보완이 사실상 쉽지 않기 때문에 미리 미리 준비를 해주기도 하고 결과물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필훈: 파주 북시티는 설계지침이 미리 제시되어 있는 곳이다. <북이십일>, <교육과학사> 등 파주 프로젝트를 지을 때, 옆의 집들에 대한 컨텍스트는 어떤 방식으로 신경 썼는가?
방철린: 기본적으로 도시계획당시에 정해진 룰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일이 시작되었다. 내가 프로젝트가 시작할 때만 해도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어떻게 들어설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교육과학사>의 경우 옆에 K씨가 설계한 <국민서관>이 있었고 뒤편에 <보진재>가 준공된 상태였다. 파주 지침의 제약으로 인해 <국민서관> 사이에 간격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국민서관>과의 이격거리가 가까운 측의 매스는 2층으로, 반대편 <청년사> 주차장과 함께 주차장으로 되어 있어 넓은 북쪽은 4층 매스로 하고, 이 두 동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부분은 투명하게 하여 도시계획에서 요구하는 투명성을 확보하였다. 이미 완성되었던 환경조건을 존중하여 이를 반영하는 방법에 따라 짓도록 계획한 것이다. <북이십일>의 경우는 설계 당시에는 뒤에 건축물이 없었고 남쪽으로는 같은 K씨가 설계한 건축물이 상당한 간격을 두고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건축주의 증축 가능성을 고려해 달라는 요구에 따라 대지 북측으로 건축물을 배치하였는데 뒤의 건축물이 남쪽으로 전진 배치되어 두 건축물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개천 건너의 큰 길에서 보면 <북이십일>의 남쪽 주차장 부분을 관통한 시선이 심학산에 까지 이르도록 되어 도시계획이 원하였던 시선의 관통 문제는 해결이 잘 된 셈이다.
이필훈: 미송널 거푸집으로 마감한 노출콘크리트와 일반 노출콘크리트가 주요 재료로 쓰였다. 재료 선정의 기준은 무엇인가?
방철린: 재료는 솔직한 표현이 가능한 재료가 좋다고 본다. 구조적으로 꼭 필요한 재료가 건축에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 그 건축물의 속성을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해 준다고 본다.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매력은 이러한 솔직성과 반영구적인 내구성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사계절이 있고 온도의 차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단열의 문제를 빼 놓고 외장이나 건축 재료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본다. 한쪽이 노출콘크리트이면 한쪽은 반드시 단열을 해야 하므로 반대편은 다른 재료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런 점이 마감재료 선정의 변화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노출콘크리트의 표면처리 방법은 거푸집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낼 수 있어 집의 성격과 함께 생각을 해야 하는 문제라 본다.
이필훈: 노출콘크리트의 유독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방철린: 노출콘크리트의 유독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는 있는데, 어디에서도 유독성의 유무에 대한 학술적 자료를 발견 못하였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어떤 대학 교수가 콘크리트가 무공해임을 증명하는 글을 실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것의 진실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는 없다. 그저 건축계에서 이야기 되는 것은 콘크리트가 초기에 유해물질이 나오더라도 공사기간이 끝날 즈음에는 양생이 되어 공해물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정도이다. 콘크리트가 정말로 공해가 없는 자재인지는 과학적 검증이 꼭 필요하다. 건축자재가 가져야 할 첫째 조건이라 하면 당연히 유독성의 유무이다. 한국의 경우 이 부분에 상당히 소극적이어서 아무런 제재 없이 발암물질이나 환경호르몬이 나오는 건축자재를 사용하고 있다. 파주출판도시에도 그런 건축물이 있는데, 집을 싸게 지었다고 자랑하는 건축주들의 건축물에 들어가 보면 이런 발암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재료가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어 안타깝다. 건축주는 물론 그 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전혀 모르니 더욱더 답답한 일이다. 싼 비지를 먹겠는가? 광우병 걸린 쇠고기를 먹겠는가?
이필훈: 건물 외부의 미송널 거푸집의 무늬가 모두 세로로 되어 있다. 디테일도 일일이 신경을 쓰는가? 가령 설계를 할 때 남들은 중요하게 안 봐도 자신에겐 중요한 디테일 문제들이 있다.
방철린: 디테일에 대해 신경 쓴다. 건물의 덩치를 보면서 그것과 어울릴 것을 감각적으로 파악한다. <북이십일>은 저층부가 유리이고 상층부가 콘크리트 덩어리이다. 위쪽 매스가 육중해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세로줄을 넣어서 양감을 더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한번 세로줄을 쓰니 직원들이 도면 작업을 하면서 가른 곳에도 그대로 세로줄을 계속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런 관성을 막는 것도 중요하다.
이필훈: 작은 집들이지만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써는 매우 대담한 구조적 시도들이 보인다. 노만 포스터, 리처드 로저스 같은 건축가들이 한국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철린 소장 연배의 선배 건축가들의 경우 한국성, 공간에 대한 건축적 논의의 집중도에 비해 건축의 기술적인 해결에 대한 고민은 집중도가 떨어지지 않는가? 방철린 소장은 정림건축과 같은 대형 사무소에서 오래 근무한 만큼 건축의 기술적인 이해도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성 등에 대한 고민에 비해 기술적 해결에 대한 제안, 새로운 시도가 부족하다고 여기지는 않는지.
방철린: 구조적인 가능성을 구체화하고 싶은 욕구는 강렬하다. 건축의 속성이 미학은 물론이고 역사, 환경, 도시, 사회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과 기술 분야를 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건축가들에게는 필요한 것은 구조의 깊숙한 계산법보다 감각으로 느끼는 구조라 본다. 그 구조에 대한 감각적 감수성으로 상상하는 부분을 구체화하는 데 구조기술사의 도움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건축가 입장에서 보면 구조기술사도 ‘구조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건축가와 대화를 할 때 좋은 구조 좋은 건축이 탄생하지 않겠는가? <북이십일>에서 건축물 정면에 캔틸레버 매스를 제시했을 때 구조기술자들은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이들이 거꾸로 구조적 가능성을 먼저 제안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연남동 <스텝> 설계 당시에도 나의 계획안에선 지하로 내려가는 외부 계단을 길이를 줄이기 위하여 층고를 낮게 책정해 놓았는데, 실시설계 시 일반적 구조로 설계를 하여 층고가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선큰가든이 좁아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원룸의 경우 칸막이 벽 자체를 한 층 높이의 보로 보면 그 아래층과 위층 보는 없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고 이 개념을 살리기 위해서 구조계산부터 설계를 다시 하였다.
이필훈: 구조는 건축에서 유효한 시스템이다. 우리 건축가들은 정작 이러한 구조와 같이 건축에 내제된 중요한 코드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며 사변과 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다. 신진 건축가들에게 새로운 것들을 흡수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힘을 기대한다면, 방철린 소장과 같은 기성 선배 건축가들의 힘은 집이 가져야 하는 원칙, 건강함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 같다. 어느 젊은 건축가가 설계한 주택을 보러 갔는데, 거실에 홑으로 된 가로창을 설치하여 창을 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창틀을 없앰으로써 입면의 멋을 추구한 장치이다. 가끔 오는 건물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주택 같이 늘 살아야 하는 건축물에서 건축가의 작품 욕이 도를 지나쳐 생긴 경우로 보인다. 반면 방철린 소장의 프로젝트에선 잘 되었다 못 되었다 이전에, 창이 있어야 할 데 있고, 열리고, 빛이 들어가야 할 부분에 선큰을 만드는, 집이 갖춰야 할 조건들이 구석구석 마련되어 있다. 입면을 위해 희생된 내부 공간들이 없다.
방철린: 건축가들의 기본자세인데 잊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기본을 일일이 챙기면 멋진 건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문제이다. 한편으로 보면 그런 실험적인 건축물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건축상 심사를 위해 다른 심사위원들과 한 젊은 건축가의 주택을 답사한 적이 있다. 겨울이었는데 건축물의 사방이 모두 유리로 되어 단열이 거의 되지 않았고, 내부가 어디에 어떻게 앉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었다. 어떤 심사위원은 그 주택을 죄악이라고까지 평가하기도 했으나, 나는 그 주택을 추천하여 상을 받도록 하였다. 건물이 잘 되고 아니고를 떠나, 새로운 생각이 실험작으로서 하나의 징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성 건축가에게 충격과 재고의 기회를 준다면 하나의 건축적 샘플이 될 수 있다. 답사 온 이에게나 설계한 건축가 자신에게나 자신의 작업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필훈: 그렇다. 살기 위한 집을 짓는 건축가가 반드시 필요하듯, 건축가를 위한 작품, 건축 어휘를 넓혀주는 실험 작들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후자를 프로토타입, 표준화 하려는 젊은 건축가들이 있다는 게 문제이다. 외국도시를 가보면 독특한 건축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배경(background)이 건강하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의 집들이 배경이 되고, 거기에 독특한 집이 형상(figure)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모두 형상(figure)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축가들의 강박관념으로 인해 배경(background)은 전무한 실정이다. 따라서 자기 생각을 지우고 주변 상황에 어울리게 작업하는 건축가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건강한 그라운드를 만들려는 사고, ‘공공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필훈: 현재 지어지고 있는 건물 중 방철린 소장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성격의 프로젝트가 있는 것으로 들었다.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의 성격과 지금 지어지고 있는 집에서의 제안은 무엇인가?
방철린: 같은 파주출판도시 내에 있는 건축물로 어린이책자를 출판하는 한국가드너사의 사옥이다. 현재 설계는 끝난 상태이고 공사 중에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출판물을 다루는 회사니 만큼 사무실 용도보다 구현동화를 읽어주는 공연장과 동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전시장이 건축물의 주된 프로그램이다. 이 건축물을 설계하면서도 점점 더 깊숙한 디지털세상에서 살게 될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좀 더 아날로그적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였다.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과 실천> 이필훈: 현재 방철린 소장은 한국건축가협회의 부회장 활동을 하고 있다. 건축가로서 작품 활동 이외의 사회적인 활동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명해 달라.
방철린: 내가 해야 할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실천을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건축가가 활동하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단체의 힘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감리 문제, 건축가의 지위 향상 등 시급한 문제들이 있지만 해결이 쉬운 일은 아니다. 2005년 건축문화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다행이지만, 급선무는 건축가의 지위 향상이다. 근본적으로 한국의 건축가가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건축제를 통해 지위 향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특히 매스컴을 이용한 홍보 가능성을 새로이 깨달았다. 홍보대행사를 통해 신문사 기자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설명회를 가졌는데 일반 언론들도 건축계 소식을 갈구하고 있음을, 오히려 건축계에서 담을 쌓고 자신들끼리만 소통하고 대외홍보에는 게을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필훈: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은 건축이 가장 핫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주는 곳이 없어 취재를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예술계가에 비해 언론 일반과 소통의 구조가 적극적이지 않다.
방철린: 한 일년 전 쯤에 한나라당에서 예총 등의 예술 관련인사들과 국회의사당에서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다.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여기에 참석하여 건축의 발전을 위하여 저해되는 요소들을 이야기하였다. 설계와 감리가 분리되어 있는 모순점, 기술자들을 관리하는 법인 건설기술법이 문화측면이 강해야 하는 건축법보다 상위법에 있으면서 건축가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는 점, 건설교통부에서는 토목위주, 기술위주 그리고 안전위주로 시스템이 되어 있고, 근무인원들도 문화 측면에는 거의 전혀 신경을 쓴지 않고 있어 건축 부를 독립적으로 두어야 한다는 점 등 세 가지를 이야기하였다. 제발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형식적인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필훈: 사실 설계감리를 분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건축사이다. 자기상황논리이다. 다세대주택의 건축주들이 주로 시공자들이기 때문에 일부 건축사들은 이들의 불법행위를 제어할 수가 없다. 결국 그 제어 권한을 따로 분리해 대행을 요청하는 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것이 전체 건축사들의 집단민원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척박한 건축계 상황의 한 단면이다.
방철린: 건설교통부에서 감리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대한건축사협회에 요청했었다. 한국건축가협회와 대한건축학회 그리고 대한건축사협회 3단체의 단체 부회장이 이 연구를 해야 한다고 하여 논의를 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의견을 모았는데 모두 감리 분리 반대에 찬성했다. 모든 감리는 설계자가 해야 하며 설계 감리를 분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안을 만들었다. 그런데 최종 보고서는 다른 사람이 하면서 또 다시 왜곡 되어지고 말았다. ‘지금 만들어놓은 감리회사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상황은 다시 환원되고 말았다. 그 국가의 수준을 갈음할 문화의 중요성보다 집단 이기주의가 이기는 안타까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동안은 이런 문제를 대한 건축사협회에서 다루어주고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늘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올해부터 한국건축가협회가 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자 계획을 갖고 있다. 건축가의 지위문제와 건축 창작활동을 하는데 저해요소라 생각하는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고자 기구표부터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필훈: 방철린 소장이 정림건축 실장으로 근무할 때 정림건축에서 설계 담당자의 디자인 크레딧이 인정되어 소개가 되기 시작했다. 다른 대형 사무실 실장들은 프로젝트 매니저가 디자인 미팅에 직접 와 설명하는 시스템을 부러워했다. 정림건축에 재직 중이었던 방철린 소장의 프로젝트도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철린: 그것이 내가 수행한 프로젝트에서 처음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회사의 대표자가 소개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젊었던 시절 나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근무자들에게 하루의 대부분을 사무실서 보내야 하는 설계실은 근무자들을 위하여 최상의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작업을 위한 모든 도구들도 좋아지도록 노력하였다. 메마른 설계실의 환경을 위하여 우리 부서만이라도 내 돈으로 설계실 책장 위에 화분으로 장식을 하기도 하고, 직원들을 위한 오디오 설치, 고적답사반 설립 등 열심히 일 하면서도 즐겁게 살고자 모든 부분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필훈: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위해 이러한 작은 싸움을 통하여 설계환경을 개선하려 노력한 것이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는 일종의 방철린 소장의 일관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설계도 마찬가지다. 거창하게는 사회 개혁이겠지만, 작게는 자신이 속한 소집단에서부터 변화를 꿈꾸는 노력은 집을 통해 주변을 바꾸고자 하는 정신과 일맥상통하다. 집을 이상하게 만들어 사회를 바꾸기보다, 자신의 주변을 조금씩 개선하며 사회를 바꾸는 것. 젊은 시절에는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할 때에는 사무실의 인테리어 환경 꾸미기부터, 그리고 50세가 넘어서는 한 집단의 사회적 위치에서 또 보다 나은 사회로 바꾸려 애쓰는 일련의 활동들이 모두 건축가 방철린의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방철린: 좋은 평에 감사한다. 건축가는 무엇보다도 작품으로 말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좋은 건축가라면 건강한 건축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하고 나아가 좋은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모든 일에도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축계의 좋은 풍토를 위해서라면 개선해야 할 일도 많지만 하지 않아야 될 일도 많다고 본다. 또 한 두 사람의 힘으로는 힘들지 모르지만 서로 동참한다면 좋은 건축을 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맑은 건축계의 풍토에서 좋은 건축을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대담후기> 건축가 방철린과 함께 돌아본 집들은 파주출판단지에 있었다. 파주출판단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일반인이든 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이든 꼭 소감을 물어보는 한편 자신의 비평적 시각을 이야기한다. 일반인들은 대개 모델하우스 집합장소 같다는 평이고 대부분의 건축 관련인들은 심한 혹평 일색이다. 마을이든 도시든 임의적으로 만든 장소가 제 모습을 갖추려면 그곳에 사람들이 살아야하고 사람들의 험한 삶의 모습도 여기 저기 터져 노출되어 있어야 하며 자연의 풍경들이 그것을 감춰주는 복합적 구조가 마련 될 때 그리고 그 위에 역사와 신화의 그늘이 드리워질 때 그 내밀한 깊이가 깊어지고 그래서 장소의 매력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파주출판단지는 이제 그 기초를 마련한 셈이고 이런 의미에서 평가는 한참 뒤로 미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가끔 그곳에 들리면 건축가들의 자기 드러내기가 안쓰러워 보인다.
지구단위계획이란 법이 생기기 이전에 이를 앞서 행한 곳이 출판단지이다. 그런데 형태와 재료까지를 다 정해서 단지에 통일된 건축 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단지계획의 정신을 이해하려 노력한 건축가들을 찾기 어렵다. 물론 정해진 규칙의 간극을 찾아 새로운 창조적 제안을 하는 것이 좋은 건축가의 자세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파주출판단지의 규칙은 일반 건축법과 달리 동료 건축가들이 만든 것이고 거기에 참여한 건축가들은 그들이 선정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게 보이기 위해 기를 쓰는 건축가들의 몸짓은 본능적인 것인지 아니면 거시적 관점에서 지역과 건축을 이해하는 능력이 거세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방철린이 설계한 집들은 적어도 파주출판단지를 만들고자 했던 건축가들의 시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규칙의 옳고 그름을 논의하기 이전에 단지를 계획할 때 세우고자 했던 건축적 정신이고 흐름이라면 개별 건물은 그 규칙을 이해하고 따라야 단지의 성격이 만들어질 것이다. 방철린이 설계한 집들은 그 원칙 안에서 변주를 한다. 단지 내의 다른 집들에 비해 평범해 보이는 것, 내부 공간의 쓰임새와 건물 형태가 잘 맞는 것, 외벽 재료가 매우 단순한 것 - 원칙에 충실한 집이 좋아 보이는 것이 건축가들이 만든 단지에서의 아이러니이다. 최근 건축계를 보면 건축이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건축의 발전을 위해서 가능한 모든 시도를 해보는 것은 바람직하며 그 실험적 시도들에 의해 건축은 분명 새로운 차원으로의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시도들이 과해질수록 ‘사람’이 소외되는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건축계에서 일고 있는 아우성들이 결국 모여 지향하게 되는 목표는 사람을 존중하는 환경이어야 한다.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식견을 갖추는 것과 집을 사용하게 될 사람들에게 좋은 건축 환경을 제시하는 것이 건축가의 몫이다. 건축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지 않는 건축가가 소중한 것은 이런 이유이며 건축가 방철린이 설계한 건물들에서 원칙이 지켜진 것을 평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박민수: 전통적인 생각에 따르면 집을 짓는 일은 집터를 고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따른다면, 집터를 고른 건축주의 생각이 설계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집터를 대하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생각이 달라 설계가 힘들어지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집이 완성된 이 시점에서 집터에 대한 생각들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건축주들이 그 땅에서 어떻게 살고자 했었고, 그런 요구조건들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듣고 싶습니다.
방철린: 글쎄요, 땅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하죠. 집을 짓건 길을 내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행위를 하건, 땅을 떠나서는 그러한 것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특히 땅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나 지형적 특성 그리고 땅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나 땅의 역사 등을 파악하는 작업은 집을 지을 때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야하는 것들입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지리(풍수항적인 지리), 생리(기름짐), 인심 등을 강조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좋다고 하는 땅들 대부분이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변덕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잘 유지되어 왔던 것은 건강한 땅의 선택이 집을 짓는 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시골에 서울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한 집을 지을 경우에 기존 동네주민들과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고려사항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서울 사람이 시골에 가서 산다고 할 때 밀폐되는 위치냐 아니면 동화될 수 있는 위치냐에 따라 동네사람들과의 관계설정이 달라지기 때문에 집터를 선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보면 미제루가 지어진 그 땅은 지형적인 조건도 좋았지만, 적당히 숨겨져 있어서 새로 만들어지는 집이 기존 동네의 풍경을 급작스럽게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주변의 다른 집들과 잘 융화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깊숙이 숨어서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가려지고 적당히 열려있는 있는 집터이었습니다. 건축주는 여기저기 집터를 보고 다닌 끝에 그 집터를 골랐다고 말했고 나도 그 집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거기다가 집을 지으면 좋은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건축주가 집터를 안내하면서 많은 생각을 풀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주로 전원생활에 대한 흥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그 땅을 보면서 건축주가 그렸던 그림은 설계자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학 교수인 건축주는 집에 대해 자신이 직접 계획한 플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보는 수준 높은 안목에 비해 그 플랜은 그리 훌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건축주가 돈이 많지가 않아서 최소의 경비로 땅을 사고 그냥 시골집 하나 마련해서 살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 동안 자신이 보아왔던 일상적인 집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있는 일반적인 주택 즉 가운데 거실이 있고 주변에 방들이 있는 그런 그림을 가지고 집을 짓겠다고 했었던 것이죠. 그러나 건축주나 그 집 안주인과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분들이 전원생활의 낭만이나 환상보다는 시골에서의 삶 그 자체에 대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집을 지음으로써 땅에 동화되는 것을 통해 주변의 경관이나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시골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땅도 좋은 데다가 건축주가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집이 생길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생각을 한 거죠. 땅은 좋지만 건축주가 OO식의 집을 짓겠다고 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죠. 나하고 작업이 안됐을 수도 있구요. 이분들에게 시골생활에 적합한 집을 지어 주면 그런 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판단과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제가 그러한 삶에 어울리는 집을 제공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설계를 시작한 것입니다.
대지를 처음 접했을 때 떠올렸던 생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건축가들은 보통 대지를 처음 보았을 때 가졌던 미지들을 집이 완공될 때까지 끌고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나는 땅을 한번 보고 바로 어떤 이미지들을 떠올려 스케치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기보다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대지를 자주 방문하고 관찰하여 그것으로부터 설계를 시작하는 편입니다. 건축주와 대지에 가본 이후에도 혼자서 여러번 대지를 찾아가서 기존에 있는 나무를 확인하거나 주변상황이나 집들과의 관계도 살펴보고 경사도를 확인하기도 했었습니다. 살릴 나무나 없애도 될 나무를 구분하여 표시도 하고 그 나무들 사이로 주변의 경관과 땅의 사용계획도 생각했었습니다. 배치계획 스케치를 하면서 거실 그리고 안방 자리를 중심으로 실들을 배치시켜 보고 그 다음에 루를 생각해 보았고, 단면스케치를 하면서 루를 살리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케치를 하다가 또 다시 가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런 식으로 스케치 하다가 가보기를 몇 번 하면서 안을 굳혀 가고 방향을 잡기 시작했죠. 한국의 전통건축으로부터 배워야할 것이 분명히 있으며 선조들이 생각한 건축설계 방법론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건축에서 얻어지고 배워지는 것들, 공간을 엮는 방식, 공간적 요소들간의 관계 형성, 그런 것들이 쓰여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을 하며 설계에 임했습니다.
마당 특히 전통주택에서의 마당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집의 물리적인 문맥과 관련되어 마당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집에서의 마당은 주변 자연과의 경계를 형성하는 건물들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공적인 성격을 갖는 2차적인 자연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마당이 가지고 있는 2차적인 성격의 자연과 주변(1차적 자연)을 연결하는 문제가 설계에서 중요한 문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땅에 대해서는 어떤 인공적인 손질도 가하지 않은채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예를 들면 필로티 등을 이용해서) 주택을 땅위에다 그냥 얹어 놓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자연의 질서와 건물이라는 인공의 질서가 병렬되어 있는 관계 같은 것이지요. 공사중에 일어날 수 있는 자연의 훼손은 조경이 아니라 땅의 모습을 복원해 놓는 방법을 통해 이러한 관계도 성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집의 마당은 인공적인 성격이 많은 것 처럼 보이고 그러다 보니 이 집 전체를 지배하는 자연이라는 풍경과 이 마당이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 지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해본다면, 이 집에서는 마당과 그 위에 뚫려 있는 하늘(즉 2차적인 자연과 1차적인 자연)이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이 집에서의 마당은 외부의 자연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당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view를 통해서 외부의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장치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지요. 하늘마당에서도 이런 방식이 아니었습니까?
마당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심에 관련된 것인데, 세계 여러 나라의 주거 건축물들을 살펴보면 중심적 구성이라고 설명될 수 있는 건축물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럽의 중정식 주택들이 그러하고 멕시코에 있는 테오티화캉 역시도 궁이라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중정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요. 팔라디오가 설계한 빌라 로툰다는 주택의 내부에 중심을 두고 주변에 실내공간들을 배치한 형식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중심을 형성하는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것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보여지는 중정이나 내부 공간의 중심은 형식적으로는 우리 전통건축의 마당하고 비슷하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다른 점은 우리 전통건축에서는 그것이 주택 내부의 다른 공간들과의 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중심공간은 바깥으로 힘이 발산되지 않고 구심적으로만 작용하는 반면에 우리 전통건축에서의 중심공간은 구심성을 가지는 동시에 외부의 좋은 자연을 향해 확장될 수 있는 원심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전통주택에서의 중심공간은 시각적인 효과뿐만이 아니라 행위나 행동, 또는 생활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외각부와도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채와 사랑마당의 관계는 그 사이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사랑채에서 외각부를 조망할 수 있는 방식이 그러하며, 안채의 경우도 안마당과 뒷쪽의 텃밭이 연결되는 방식이 그러하지요. 이처럼 우리의 마당은 공간적인 중심이면서 동시에 외부와의 연결관계도 치밀하게 고려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건축은 마당이라는 공간적인 중심만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외각부와의 공간적 연결에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것이 한국전통 건축이 서양건축과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라로툰다가 주변에 대하여 친화적이지 않고 자기과시적이며, 사보아주택 같이 외각부에 대해 다소 대화적인 입장을 취하고는 있으나 외부와의 관계가 시각적이고 형식적에만 그치고있는 것들입니다. 반면 한국 전통건축의 경우는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이 실제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주택에서는 시각적인 연결 관계를 넘어서 생활, 행위들이 서로 연관을 갖고 발생될 수 있도록 자연과 접한 건축의 형식이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당이 마당 자체로서 의미 뿐만이 아니고 건축물의 외각부에 있는 자연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형식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죠. 여기의 마당은 화초 같은 것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밖에 있는 자연이 있는 그대로 좋기 때문에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서 마당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 집의 마당에 꽃나무와 화초를 심었다고 상상해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마당이 정원이라는 것과는 달리 외부의 자연을 더 살릴 수 있는 환기의 요소로서 작용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이 마당과 이 마당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서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 있는 요소(자연)와 마당을 같이 볼 수 있고, 누를 통해서 밖에 있는 경치가 마당하고 같이 볼 때, 누가 없을 때는 문이 열려서 문 밖의 경치가 마당하고 같이 볼 수 있을 때, 그것이 같이 있음으로서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까 거울 말씀하셨는데 좋은 예라 생각합니다. 거울에 무엇이 잔뜩 그려져 있다면 거울을 통해서 물체를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자연 하나만 보면 자연 그 자체이고, 마당만 있으면 마당 그 자체이지만, 그 두 가지가 같이 놓여져 있기 때문에 두 개의 가치가 더 상승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땅(집)에 사는 사람이 진정한 방식으로 자연을 체험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따뜻하고 춥고 비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방식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드리자면 우선, 가운데 공간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의미론적으로 볼 때 거기서부터 가족과의 관계라든가 생활이 시작되어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 두 번째는 건축주가 그곳에서 생활하기에 알맞은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마당이라든가 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당과 누를 연결고리로 해서 사람과 자연을 일체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방안에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그 분들이 원하는 자연속에서의 생활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듣다보니 중심과 자연이라는 상당히 중요한 개념들이 설계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사회가 중심과 자연이라는 개념들을 그리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주의나 다양성이라는 말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어찌보면 중심이라는 개념은 그 가치가 부정되거나 혹은 그 가치가 격하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건축을 통해 중심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중심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어떤 의지를 동반하는 발언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주택에서 중심을 얘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주택이라는 것이 가족이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모여사는 조그만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택에서는 가족들간의 유대관계도 확실히 해야하고 서로가 서로를 느끼면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필요하며, 건축이 그런 공간을 제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심에 마당을 도입한 것은 전통주택에서 배우는 바와 같이 마당이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능적 이유보다는 그 공간을 통해 다른 공간들이 개념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공간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어있는 마당을 통해 각각의 방들이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제루의 서재에서 창을 통해 마당 건너편의 거실을 보고 다시 거실 바깥의 자연까지도 볼 수 있도록 하거나, 안방에서 마당을 통해서 누를 보고 다시 누를 통해 바깥 경치를 볼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였습니다.
주변의 경관이 좋으니까 자연이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장님의 경우에는 주택을 설계하는 경우 항상 자연이라는 주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자연이라는 개념 역시도 어찌보면 앞에서 언급되었던 중심이라는 개념과 함께 현대사회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개념중의 하나가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자꾸 자연을 직면하게 하려는 어떤 의도라도 있으십니까?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보다는 한국의 전통건축을 보고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전통건축의 공간만들기와 연관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전통건축이 자연을 그대로 두게 하는 것이며, 더불어 그 자연 전체가 다 나의 세계일 수도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빠져들어갈 수 있다는 것, 다시말하면 자연과 내가 다른 주체가 아니고 하나일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건축에서 사랑채와 사랑마당 그리고 그 밖에 있는 담이 이루는 관계를 예를 들어봅시다. 사랑채에 앉아서 가까이 있는 담 안의 마당 분위기에서 갖게되는 감정은 자기 내면의 세계로의 침잠입니다. 담너머의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은 또다른 의미를 갖게 합니다. 내부에 주목하게 될 때와 달리 외부에 주목할 때는 자기를 자연속에 던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요, 이것이 한국건축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특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부리기 보다는 자연의 좋은 조건들을 그대로 환경으로 만들자는 정신을 닮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이지요. 자연 즉 원래있는 그대로의 세계처럼 사람을 강하게 움직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이라는 개념이 건축을 하는데 있어서 앞으로도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간의 작업을 보면, 자연이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시니까 도시 안에서도 자연을 끌어들이려고 하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담아내는 독자적인 방식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우리의 전통건축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옛날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옛날 이야기가 지금에도 유효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생각은 중심을 말할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심이라던가 자연이라는 개념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회상황속에서 지금은 쇄락했을 수도 있는 그런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중요한 주제로 계속해서 붙들고 계시면서 실천하는 데에는 어떤 의지가 그 안에 개입되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주제들을 강조하는 것은 어찌보면 건축가로서의 활동에는 많은 제약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보통신매체나 교통수단의 발달 등을 통해 세계가 하나의 블록으로 변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미래가 그러한 시대로 치닫을수록 지역성이라든가 정체성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화라는 면에 있어서 더욱더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하면 경제나 정치인 경우에는 어떤 것이든 좋은 것을 택하여 사회에 반영시켜도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문화인 경우에는 그 지역의 특성이나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중심이 되는 생각들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는 문화의 독자성이 더욱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옛날부터 있어왔던 중심성에 대한 것인데 주택인 경우에 특히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가족의 개념이 없어진다거나 개개인이 흩어져 사는 사회가 가능하지 않다면, 가족의 개념을 늘 유지시킬 수 있는 마지막 무엇이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가족이라는 공동체적의식을 꼭 잡고 있어야 할 핵이라든지 중심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가족이라는 것은 깨지고 말것이라는, 낡아 보이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있죠.
루 밑으로 진입은 어떻게 해서 정해진 것입니까. 전통의 직설적인 차용이 아닙니까?
루 밑으로의 진입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에 인용한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갖다 쓰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루 밑으로 진입하는 것이 전통주택에는 없잖아요? 사찰이나 향교에는 있지만, 그러한 진입방식을 도입한 것은 그것이 이 주택에 꼭 맞는 진입방법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의 시작은 안방 배치의 변화로부터입니다. 안방과 마당 그리고 누가 이루는 배치는 안방이 주택의 깊숙한 곳에 숨어있었던 전통적인 주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남녀가 유별해서 각각의 공간을 요구했던 전통사회와는 달리 남녀의 함께 이루어지는 지금의 사회구조에서는 안방이 전통적 방법같이 사랑채와 구별되어 숨어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마당과 연결시켜 놓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집의 경우에는 특히 앞에 누가 있기 때문에 마당 안쪽에 방을 놓아서 안방에 있으면서도 밖의 경치를 감상도 할 수 있고 집의 중앙에 놓아 집안의 중심축이 되도록 한 것이죠. 그리고 이런 생각이 지금의 사회구조와도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라면 굳이 현관으로의 어프로치를 바깥쪽에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경사지이다보니 자연히 누가 상부로 들리게 되고 그 밑의 공간을 진입에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배치를 만들게 된것이죠. 아무 생각 없이 옛날의 것을 따다 갖다놓은 것이 아니고, 현대 건축을 만듦에 있어서 무엇이 옛날의 생각과 달라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이렇게 만든 것 입니다.
담장은 나중에 하실 겁니까? 없어도 좋을 것 같은데요.
담은 집주인이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가까이는 안하고 바깥쪽으로 하는데 그것을 solid한 것이 아니고 탱자나무 같이 시각적으로는 보이되 바로 들어 올 수 없도록 만들자고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 집은 돈이 없던게 다행이예요. 돈이 많으면 담도 하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하다 보면 소위 좀 농촌에 있는 전원주거로서의 분수에서 벗어날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전원주거답게 약간의 모자람을 갖게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재료 선택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재료에는 그렇게 의미를 두지 않았어요. 재료라는 것이 그냥 집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지 그것을 통해 뭔가를 표현해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재정적인 문제도 한 개의 구실로 등장했지요. 재료에 대한 생각은 배제하고 작업을 했습니다. 형태 만들기나 부분적인 디자인에 몰두하기보다는 개념이 살아있는 집만들기에 생각을 집중하고 작업을 했습니다.
형태 만들기를 생각하지 않거나, 건물이 어떻게 보일까 보다는 건물을 통해서 자연과 관계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재료를 통해서 뭔가를 표현하려는 생각을 배제하려고 했다는 말씀을 듣다보면 이 집을 지으면서 행한 소장님의 작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건축가의 작업과 조금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축가로서 그러한 작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어떻게 보면 새롭게 정의해 봐야 될 부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집은 장소가 워낙 좋았고 거기서 보이는 경치도 좋았고 땅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워낙 크게 있었기 때문에 거기다 뭔가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들이 건축의 본질적인 문제를 떠나서 사람의 욕심 쪽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땅에 필요한 집은, 결국 이 집이 담는 것은 생활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풍요로움을 느끼고 가족이라는 형태를 유지시켜 가면서 마을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 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집이 가져야 될 큰 역할이고 목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작업을 했고 그러다 보니 공간적인 것, 그리고 그 땅 그 마을과의 관계맺기에 관심을 쏟았고, 그 집이 형태적으로 어떠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형태적인 것을 배제하다보니 재료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좋은 재료를 쓴다거나 미적 감각을 살려 배치하고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에 대한 시도를 한다면 그것이 자칫 마을 사람들의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을 했죠. 농촌 한 가운데 있는 주택이 주위에 있는 집들과 과연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었습니다.
건축 속의 언어, 그 한국적 감수성에 대하여 On the Korean Sensibility in the Architecture
(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김승귀 디렉터 교수와의 대담)
김승귀: 방철린 소장의 건축적 출발과 그 연유는 어떤 것인가? 평소 말하는 무위의 건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러한 건축적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방철린: 건축은 설계하는 사람 입장에서 욕심을 내기 쉬운 직업이다. 건축설계를 새로 수임 받을 때면 뭔가 새로운 근사한 집을 설계해 보겠다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계에 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설계를 젊었을 때부터 계속 해오다 보니까, 문득 설계된 내용에 건축가의 욕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건축가의 욕심은 다 털어버리는 대신, 새로 지어지는 건축에 의해서 도시나 자연이 갖고 있는 에너지들이 변질되지 않도록 유지해 주는 것이 우선 가져야 할 건축가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렇게 지은 집은 우선 그 앉음새가 편안할 것이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나름의 쾌적함과 편안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건축가 자신이 다 털어버리고 건축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건축주건 건축가이건 대개 돋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적인 욕심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땅이 있어야 집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 땅이 하는 이야기에 주목하고 땅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건축은 여기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방 소장이 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출발 자체가, 그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데서 비롯되는 정체성을 통해 이미 땅을 보는 관점이 우리화 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수 있겠다. 서양건축은 땅에서 출발을 해도 대지, 위치 선정 등에서 공간 점유 방법이 확연하게 바꾸어지는 다이어그램을 많이 쓰고 있다. 하지만 근래 서양건축에서도 환경 문제에 봉착해서 땅을 건드리지 않고 작업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본질적인 그들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현재의 환경 이슈에 대한 방법론으로서 관심을 갖는 쪽인 것 같다. 한편, 우리나라 건축은 옛날부터 친환경적이며 그것을 차용하면서 발전해왔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환경 문제의 측면으로서보다는 풍수나 샤머니즘을 통해 땅을 존중하는 사상에 원초적으로 지배되어 있었기에 선조들이 땅과 조화가 되는 건축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따라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정서를 논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자꾸 묻는 세태 -그것의 생산성, 이점에만 관심을 가지는 풍토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관념이 건축을 통해 보존될 때 그것이 바로 한국적 정신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관념적 건축이 우리 시대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오직 생산성만을 생각하고 사상과 서정을 경시하는 경향은 이미 서양적인 사고방식이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의 몸과 세습되어 온 우리 고유문화 사이에 자꾸 모순이 생긴다. 건축은 서비스와 사회적 이슈를 던져줘야 하는 거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단지 이성적으로만은 설득할 수 없는 감성적인 설득력을 갖는 건축도 있을 수 있다. 방 소장의 작품은 '불확정성', '어반 보이드(urban void)' 같은 단편적인 설득보다는, 이렇듯 '보아라, 땅이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단순한 출발, 관념적 당위성이 많이 읽혀진다. 예를 들어 <원주제일교회수련원>이나 펜션하우스인 <태봉리 산빛마당>(이하 산빛마당)은 건축 자체의 아름다움으로써 보다는, 사람들이 그 곳의 땅이나 경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이렇게 건물이 지어질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끔 설득한다.
언급한 바와 같다. 서양에 가서 건축과 도시를 보며 느끼는 것은 그 위용이나 번듯한 형태, 입면들이며, 역사적으로도 서양건축은 그러한 사고로 지어져왔다. 그런 것을 보고 나는 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우리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수주의를 내세우려하는 의도가 아니다. 객관적인 비교를 해보니 우리의 것이 더 상위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을 생각하고 건축이 여기에 어우러져 일체감을 갖게 하는 것이 서양건축보다는 더 우위에 있고 깊이가 있다고 느껴왔다. 안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감성적으로 더 평온하고 우쭐댐 없이 겸손해지며, 자신을 자연 혹은 도시 속의 한 요소로서 인식하게 하는 건축 - 이런 건축이라야 진정 인간세계에 존재 가치가 있는 건축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을 해본다. 건축가가 자기 자신을 버리고 건축을 하겠다는 생각이 건축 속에 숨겨져 있어, 그 건축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세계를 바르게 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관념적이냐 아니냐, 시각적이냐 아니냐는 두 번째 문제이다. 가령 팔라디오(A. Palladio)의 <빌라 로툰다>에 사는 사람들은 우월감을 느끼며 살지도 모른다. 언덕 한가운데 보란 듯 올라서 있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표정과 자세가 얼마나 교만스럽고 도전적일까 상상이 간다. 하지만 그런 것이 과연 건축가가 건축주에게 해 줄 노릇일까? 건축가들이 중요하게 여기고 다루어야 하는 것은 관념적인 이야기 이전에, 자신이 설계한 집에 살 사람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관심을 가지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욕심을 함께 버리는 것이 좋은 것이며, '무위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집이 하나의 계급을 나타내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빌라 로툰다>를 빌어 말한 점에 공감한다. 요즘 사람들은 집의 '정주성' 등을 따지기 전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또 다른 자본가치로써 집을 구입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 집에 편해서 산다는 'dwelling'의 개념보다, 내가 이런 집에 산다는 것을 헤게모니로서 보여주려는 것이다. 특히 서양식 건축에 사는 데에 우월감을 느끼는 우리나라의 이 같은 헤게모니는 구한말 무렵 수입된 것이라 안타깝다. 한편, 영국의 경우는 피어스 거프(P. Gough) 같은 건축가가 영국 국민들에게 현대 건축가들이 지은 새로운 형식의 집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영국인들이 ― 그들이 물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 빅토리안 양식의 옛 집들도 여전히 살기 좋고 편한데 굳이 바꿔야 할 필요가 있냐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인상 깊었다. 그들은 그런 식의 전통 보존을 통해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방 소장은 거주에 대한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그 집이 자본주의적 계급이 아닌 또 다른 문화적 인프라가 있는 계층이 머무는 곳이 되도록 하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자신이 좀 특별한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지향하는 방향과 그 내용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일 수 있다. 나를 찾아오는 건축주는 대부분 나의 작업 내용을 여러 루트를 통하여 미리 파악하고 온 상태이기 때문에 거의 비슷한 수준의 디자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행할 수가 있다. 계획이나 디자인의 주를 이루는 어휘들이 이야기되는 동안에도 건축주와의 이견의 폭이 적어서 대화를 통해서 쉽게 조정을 해 나갈 수 있다. 설사 전혀 다른 이견이 있다 해도 서로의 설득으로 방향을 잡아나간다.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부류의 주택이 있겠지만, 이런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은 특별하면서 품위를 지킬 수 있고, 뛰어나 보이지만 맑고 깨끗함을 유지시킬 수 있는 그런 집을 꿈꾼다. 나는 늘 건축주에게 설계한 집이 그렇게 호화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호화롭기보다는 정신이 머무는 차분한 집이 더 좋지 않을까라고, 돈만 많은 갑부가 사는 집보다는 넉넉하고 품위 있는 선비다운 집으로 유도한다. 쉬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도 건축가들이 건축주를 이런 방향으로 유도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 가서 보면 좋은 것이 있는데 그걸 소화해서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는 건축주들이 있다. 물론 나는 가급적이면 다 가본다. 건축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을 하기 위해서다. 그것을 소화해서 나의 건축 언어 속에서 건축화 할 수 있는 내용이면 받아들이고, 디자인의 정신이 전혀 다를 경우는 나의 건축이 지향하는 방향을 설명하면서 건축주의 생각 중에서 건축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설득한다. 그렇게 해서 건축주들이 나의 생각을 따라주게 되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결국 우리 것에 공감하게 되는 일은 국가적인 무조건적 계몽에 의해서보다, 방 소장과 같은 작업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굳이 우리 것 남의 것을 구별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의 감성에 맞게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고, 또 그것이 우리한테 익숙하고 유익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현대건축에서 이롭게 발전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외래문화 역시 쉽게 우리의 정서에 적응되어 우리화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이 어우러져 바뀌고 변천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어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단지 나의 가치 있는 좋은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남의 떡에 두는 관심이 문제이다.
때로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문화란 그대로 있는 것 자체이며, 만들어지거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는 것이 모두 문화의 일상적인 현상인 것이다. 방 소장의 건축은 이렇게 사람의 있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문화의 현상적인 측면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고민은 특히 공간 작업에서 마당이 많이 표현되는 가운데 발견된다. 현재, 지금에 있어 마당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큰 요소이다.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인해 그 공간이 중심이 된다. 그 안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든 안하든 간에 정신적인 중심으로 작용한다. 또한 마당을 지나는 시선을 통해 마당을 둘러싼 공간들은 서로 건너편에 있는 상대방들을 느낄 수 있다. 결국은 전체를 하나로 묶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시선이란 재미있는 단어이다. 내가 보는 것도 시선이지만 내가 보임을 당하는 것도 시선이다.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한 것인가?
그렇다. 아내가 건너편에 있는 남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고, 남편도 부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함으로써 서로 보이지 않은 교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아파트 평면을 보면 거실이 중심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거실을 떠나면 바로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공간도 없이 바로 각 방들로 연결되는데, 각 방들과 거실사이의 문을 닫고 나면 전부 남의 세계가 된다. 집안 식구들끼리 얼굴 보기 어려울 정도의 사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열려져 있는 마당과 그 주변의 개개의 생활공간들이 서로를 더 느끼게 하고 연결시켜줄 수 있다.
거주 방식을 배려한다는 측면도 있는가? 가령 마당이 있는 집에 서양 사람들이 산다면 바비큐 파티를 여는 등 그들 나름의 문화적 방식대로 사용할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식 집에 산다면 파티오(patio)에 천막을 치고 상을 치루는 장소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집이란 형상,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써 사용하도록 하나의 잠정적인 터를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당 역시 이처럼 각 문화에 잠재된 삶의 거주방식을 존중하고 드러내주는 방법으로써 현재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예전 농경 사회에는 집안 식구들이 모이는 일도 많았고, 제례 등의 전통 행사를 비롯한 마당의 쓰임새도 상당히 다양했다. 추수한 곡물들을 정리하는 일, 장작을 패서 부엌 옆에 쌓아놓고 겨울을 지내는 일, 그리고 관혼상제 행사 등을 위해 온 동네 식구들이 마당을 이용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물론 손님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 수도 있겠지만, 그런 행사는 가끔 있는 일이다. 현대에는 거주자들의 상호간 의사소통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마당은 이렇듯 식구 서로 간에 외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일 수 있다. 즉, 심미적인 의미로써 보다는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가정이라는 집단을 영위하는데 정신적으로 유익한 요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가족 구성원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마당을 통해 다시 치유해준다는 것인가?
그렇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하늘마당'과 같은 실제 프로젝트에서 건축주를 통하여 확인된 사실이다.
도시 내에서도 건축 작업을 많이 했는데, 도시적 현안에 대해서는 방 소장의 건축관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처음 이야기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어떤 건축을 하건 외부에서 그 집이 어떻게 보여 지느냐 보다는 도시나 자연 속에서 어떻게 앉혀지느냐 ― 즉, 그 집의 태도에 관심을 갖고 도시에 걸 맞는 집의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건축의 프로그램이 어떠하든 그 건축 내에 있을 사람들의 행동이나 행위에 관심을 갖고 이들의 행동이나 행위를 어떻게 담아 줄까를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태계획은 특별히 따로 구성하기보다, 앞서 이야기한 도시를 생각하는 마음과 건축 내부의 행위에 의해서 구축되어진 틀에서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진 것으로 보고 이를 최대한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마무리한다. <산빛마당>에서도 주인 세대와 객이 와서 자는 공간을 구분하면서도 관계를 갖도록 설정하고, 그 쓰임새도 다르게 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원주제일교회수련원>의 경우는 그 안에 일어나는 행위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이에 '펼쳐진' 건축적 배치를 가져야 다양하고 많은 행위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집 내부에서 모든 행위가 일어나고 종결되며 현관 밖으로 나서면 또 다른 외부의 행위가 별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구분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외부와 내부가 늘 공존하면서 생활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아무 데나 나갈 수 있는 문 혹은 창문들이 곳곳에 있어서 내외부가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곳들을 계획했다. 중심에 배치한 마당 주위에 수련원의 주요 활동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들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그 장소가 상당히 유용하고 가치 있게 쓰일 것이다. 야외 뷔페 같은 비정규 행사는 물론, 신도들이 예상 외로 많아져 식당이 비좁아질 경우 밖으로 나와 이 마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많은 신도들이 모였다가 나갈 때 홀 면적이 부족해지면 마당으로 뚫고 나가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신도들이라는 카테고리가 있긴 하지만 그 연령이나 부류 그리고 수에 있어서 먼 장래까지는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런 행위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의 개념을 갖는 장소로서 해석을 하였다.
시간성을 예상하고 구상했다는 말인가?
건축가가 한 방향을 정해서 이 집은 이렇게 쓰여야 한다고 설계하기보다는 ― 종종 건축가와 건축주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만큼 ― 그 곳이 다르게 쓰여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회자되는 '결정하지 않는 프로그램', '불확정성' 개념과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한 건축물이 오래 견디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요구 조건에 변모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만 만들어주는 것도 현대 건축가들에게 필요한 또 다른 태도가 아닐까?
맞다. 더군다나 시대가 워낙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만큼, 건축가들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축이 도시에 많을수록 도시는 풍부하고 여유로움이 있어 시민들에게 마음의 풍요를 제공하고 건축 또한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건축가들도 있는데, 렘 쿨하스(R. Coolhaas)의 경우는 불확정적인 요소들을 미리 결정해서 다이어그램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해결안을 제시했다. 국내 건축계의 문제는 그러한 외국 건축가들의 이론이 그 좋고 나쁨을 떠나, 검증도 없이 들여와서 자기 나름의 해법을 마구 풀어헤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맞고 안 맞고를 따지지 않고, 그 이론의 브랜드 네임만을 차용하여 건물을 짓고 그것이 해결을 주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 건축가들은 마치 우리의 문제점이 서양 이론의 헤게모니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같은 유행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걸 맞는 상황인지 외국의 갖가지 건축 사조들이 최근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국내에 상당히 많이 보급되고 있다. 특히 외국에서 수학을 하고 들어오는 젊은 건축가들이 들여오는 새로운 사조들은 국내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이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이전에 일시적인 혼돈의 현상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이러한 이론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려면, 단편적이거나 편협된 생각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며 적절한 검증과정을 거쳐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이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도들이 이러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고 편협된 유희에 머무는 것이라면 일회적인 시도로 끝날 수 있다.
걱정되는 것은 이러한 외래 건축문화가 전문적인 건축가 집단에 의해 수입되지 않고 일부 건축주들의 감각적 취향에 따라 수입되는 경우이다. 전문 건축가가 말하는 방법이 희박하기도 하고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
감각적 취향에 의한 것이라면 건축가가 개입된 문제와는 별개라고 본다. 이런 경우 그 담당 건축가가 설득으로 처리해야할 문제가 아닌가? 건축가 자신이 건축에 소신도 없이 건축주의 감각적 취향을 쫓아다니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커피를 마시는 서양 문화도 우리 방식대로 마시면서 우리의 문화가 되었다. 외래문화가 시간을 통해 허용력 있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 것이 되고, 감각적 이벤트로 그친다면 곧 사라질 것이다. 결국 외래문화라는 것이 지역성의 고착문화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을 때 그 것의 생명력이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원주제일교회수련원>과 관련하여, 지역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가? 종탑과 빨간 십자가가 우리나라 교회의 아이템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교회를 통해 신성함을 찾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해줄 수 있는 우리만의 조형적인 언어는 무엇일까?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의 우상론들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 신이라는 존재도 결국에는 실제 경험적 존재라기보다는 믿음과 언어, 그리고 감성에 의해 형상화될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신을 느끼는 형상의 감성도 결국 문화의 한 일부분이다. 이른 바 신이라는 무형의 존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지하게 해 주는 것, 즉 이미 있는 그대로를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신의 형상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세습되어 온 지역문화마다의 인간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비유컨대 하나님이 백인이라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고딕양식의 건축 조형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인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신'일 뿐인 것인데 말이다. 서구의 교회건축은 웅장함이 신을 느끼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안도 다다오(安蕂忠雄)의 <빛의 교회>나 <물의 교회>에서 보듯, 일본 교회들은 또 그들 나름의 감성을 가지고 신에게 접근했다. 우리나라의 몇몇 교회 작품들도 신성에 대한 감성과 시적인 부분을 풀어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원주제일교회수련원>에서는 이 같은 고민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기도를 통해 신과 대화를 하기 위한 장소는 웅장함과 화려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신과 내가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선 먼저 아무 잡념이 들지 않게 만드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 맨 처음 카타콤(Catacomb)에서 시작된 서구의 교회도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교회건축이 건축의 대표성을 지닐 만큼 화려하게 성장하면서 변질된 부분이 다소 있는데, 이는 어쩌면 교회 건축이 잘못 가고있는 방향일지도 모른다. 단아하고 조그맣고 어머니 품 같은 분위기가 진짜 교회의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교회와 종교인들도 신도 수 증가만을 초점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신도들이 신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 <원주제일교회수련원>은 수련원이기 때문에 종교 공간이지만 순수한 교회와는 또 틀리다. 수련과 더불어 다 같이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하므로, 한 공간 안에 이러한 측면들을 어떻게 해결할 지에 대해 신경을 써야했다. 그래서 마당을 설정한 것이다. 이 곳이 단순히 조용한 공간으로만 남기보다는 축제 분위기를 갖는 복잡한 공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회에서 빛의 표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민했나?
자연의 빛에는 생명력이 있다. 조명 기구에서 나온 빛은 예쁘게 보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인공적인 빛에는 감정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기후의 변화에 따라 밝고 어두워지며, 황혼녘의 빛처럼 시간에 따라 달라지면서 세상을 느끼게 하는 자연의 빛이 곧 살아 있는 빛이다. 그러한 빛을 통해 교회를 비춤으로서 신도들의 감성이 좀 더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에 <원주제일교회수련원>에서는 자연의 빛으로 충분히 교회의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디자인하여, 대예배실과 소예배실 모두 조명 기구를 켜지 않고도 측면 빛을 통해 실내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하였으며 특히 대예배실의 경우 전면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이 중심성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원래 함께 의도했던 천창 계획이 교회 측의 반대 의견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런데 빛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강렬한 빛을 싫어한다. 발코니를 만들어놔도 나가질 않고 오히려 막는다. 유럽 사람들은 빛이 부족해서인지 빛을 향해 나가려고 하고, 발코니에서도 뜨거운 볕 아래 일광욕을 한다. 서양 건축가들 또한 루버나 캔틸레버 없이 빛을 많이 받아들이는 건축을 설계한다. 반면, 우리는 빛을 많이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지 크게 빛을 받아들이는 개구부를 만들어놓고도 결국 차양 등으로 막아버린다. 볕이 잘 드는데도 거실의 인공조명이 우리나라 같이 밝은 곳도 아마 없을 것이다. 자연의 빛을 잘 누릴 수 있는 전원주택에서조차 아파트처럼 조명을 설치하지 않는가? 확실히 빛을 느끼는 방식도 환경에 지배받는 정서의 일종인 듯 하다.
빛에 대한 잘못된 인식 탓도 있을 것이다. 주택이라면 될 수 있으면 모든 방이 남향으로 면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채광과 무관하게 인공조명을 선호한다. 자연광의 신비함에 대한 계몽이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산빛마당>과 같은 펜션하우스는 앞으로 주 5일 근무제와 더불어 확산될 수 있는 전원주택의 형태로도 파악할 수 있다. 더불어 전세 및 렌트도 가능하여 다양하게 쓰일 여지가 있는 형태로서, 또 다른 새로운 문화로 확산될 것 같다. 교외 전원주택으로서 펜션하우스가 가질 패러다임에 대해 말해 달라.
사실 건축주가 <산빛마당>을 의뢰하기 전까지는 펜션하우스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소하였다. 보통 이야기하는 민박 집과 무엇이 다르길래 그렇게 부를까 하는……. 그러나 결국 이 역시 전원에 있는 주택과 같은 개념이라면, 손님들을 초대하여 묵어갈 수 있도록 하는 객실부분과 주인 세대가 생활하는 주거를 병치시킨 형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전원에 위치하므로 덩어리로 뭉쳐진 공간 형태보다는 넓게 펼쳐져서 각 동들이 그룹을 이루어 외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주인 세대와 게스트 동간의 프라이버시는 마당의 깊이를 이용하여 보호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어떤 사람들이 주가 되는가? 건축주의 개인적 기호성에 따라 작가가 선택되는 경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경향을 어떻게 끌어가는가가 또한 건축가 전문 집단의 몫인 것 같다. 즉, 건축 작업 외의 작업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건축주가 어떤 건축가의 건축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해 의뢰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좋은 건축들에 대한 정보가 일반 건축주들에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건축물이 오픈할 때 홍보 기획의 시나리오도 계획하는 등, 보다 좋은 건축물의 존재를 알리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일부 계층의 관념적인 전유물로서가 아닌 대중적인 건축의 형성이 가능하리라 본다. 특히, 방 소장은 여러 세입자들을 고려해야 하는 다가구주택을 많이 설계했는데, 이러한 대중화의 문제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대개의 건축주들은 보통은 간접적인 소개를 통하거나 인터넷의 건축 관련 사이트나 건축 관련 서적을 통하여, 그리고 건축물을 직접 보고 물어물어 사무소를 찾아오기도 한다. 이렇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작가에 대한 정보와 작품에 대한 성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기 때문에 건축물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향의 디자인을 제시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실 좀 부족하다면 홍보를 적극적으로 못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건축주 스스로 찾아본 결과에 의해 소극적으로 설계를 수임 받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집을 설계할 때는 우선 그 집에 살 사람이 누구인가 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하고 이들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질까라는 실제성을 면밀히 배려하다보면 이들의 생활에 정말 애절하게 필요한 공간을 신경 쓰게 되고, 이러한 점이 집이 완성되더라도 실제 입주한 사람 간에 회자되면서 그 장단점이 이야기된다.
이미 건축주들은 다가구주택을 집이 아닌 교환 가치, 마케팅의 목적으로 보고 있다. 즉, 사람들은 정주성보다는 가격에 맞는 세입 문제를 더 따진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건축가들은 거기에 편승하여 평면을 수정한다.
사실 다가구주택을 경제적 가치는 부동산의 주도하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들 부동산들은 땅이 있으면 먼저 가설계(규모검토를 이들이 이렇게 부름)를 만들고 건축비를 산정하여 그 동네의 임대 상황을 감안해서 땅값과 집세를 결정, 그 안에서 공사가 진행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건축주에게 말을 해버린다. "당신이 집을 지으려는 이 땅에는 몇 평짜리 집이 나오고 세는 얼마이다. 그래서 얼마의 이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그 금액이 문제가 된다. 부동산이 정한 이 금액 수준에는 허가만을 위한 개략설계비용과 수준이 떨어지는 공사비로 산정된 것이기 때문에 건축주가 이 정보에 솔깃해 있는 상태에서 그래도 조금 좋은 집을 지어보겠다고 설계사무소에 오면 설계비며 건축비며 듣던 것과는 다르게 되고, 그러니 머릿속에 생각한 이익금이 줄어들게 된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찾아와 생각을 고치는 사람들은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는 것이고, 반면 부동산 쪽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쪽에서 이야기한대로 건축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 집단들은「프로그램 기획 측면에도 폭넓게 참여하는 일이 절실하다. 입주자를 위하는 동시에, 기획을 통해 건축주의 이익도 고려해줄 수 있는 건축적 방법을 먼저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런 건축의 프로그램의 기획에 대해서도 이제는 건축가 전문 집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근간에 확산되고 있는 고시원이라는 프로그램은 일종의 도심 내의 서민주거 형태라 할 수 있다. 일종의 도시 사글세방이다. 그런 고시원을 증축하려는 건축주의 요구 조건은 당연히 수익 창출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건축가가 무조건 정주성 운운하며 좀 더 넓은 방, 쾌적한 환경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하지만 또한 반면에 그렇게 계획해주는 것도 건축가의 의무이다. 따라서 정해진 예산 아래에서 무조건 형태와 건축으로만 고민하기보다는 일종의 프로그램 기획으로 그것을 대처할 수 있다. 유럽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컨셉 하우스(concept house)'는 정해진 예산 아래 풀어내는 주택 현상설계로 그 이름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저예산이지만 보다 쾌적한 고시원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건축가의 디자인적인 가치이다. 이를테면 고시원 방 2개 정도의 공간 면적을 이용하여 현관 로비에 '라면 바' 같은 것을 만들어주면, 건축주는 그 라면 바를 세입자에게 임대함으로써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세입자들은 라면이라는 아주 일상의 프로그램에 대해 서로 순번을 정해 일일 라면 바를 운영하며 자투리 수익을 남길 수도 있으며, 이는 단절된 고시원의 커뮤니티에 밝은 웃음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로비공간을 안겨줌에도 단순히 공간으로서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프로그램의 기획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처음에 다가구주택에 손댔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한 다가구주택을 반(半)지하실을 가본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 다가구주택들이 대다수란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다가구주택을 짓겠다는 건축주가 나타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이 연결되어 몇 개의 작업을 더 하게 되었다. 김 교수의 지적같이 건축주와 입주자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의 건축적 모색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방철린 하면 다가구주택 전문가처럼 되어버린 감도 있다. 아무튼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입주 예정자들이 시공이 끝나기 전에 찾아와 보고 먼저 가계약을 하기도 했는데,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 집이 누구한테라도 넘어갈세라 매일 와보는 입주 예정자도 있었다. 건축주들에 의하면 여타 건물과 달리 지하에 마당도 만드는 등의 다른 분위기에 세입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아마도 여태껏 이야기한 주된 내용은 '한국성', '한국적' 등과 같은 일반적인 논란이었던 것 같다. 수도 없이 이야기되는 건축의 한국성, 정체성 문제들……. 방 소장의 건축이 한국성이라는 말과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한국성을 논하는 데 어떤 피해 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을 없잖아 볼 수 있다. 혹자는 한국적이란 것이 없다고 역설하며, 서구화된 도시의 형상에 자괴감부터 느끼는 어조로 그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일부는 유달리 한국적 공간을 재생산하기 위한 노력에 강박화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러한 보존의 가치가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한국적 가치의 재생산에만 몰입하기보다는 한국적 가치의 재발견이라는 점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그 형상이 변모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세습된 우리의 정신적 가치는 결국 잔존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건축물을 보고 '단아하다'고 느끼는 정서와 감성은 한국적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우리의 건축을 보면서 그들이 대해보지 못한 그러한 '단아하다'는 정서 - 표현하지는 못 할지라도 - 그 엇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서양인은 그 감성의 공간에서는 한국적인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러한 한국의 정서가 우리의 것이 아니겠는가? 즉, 한국성이라는 것은 사람과 건축이기보다는 그런 '단아스러움'이라는 우리만의 감성과 정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반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형태의 한국적 강박성보다는, 우리 정서의 치유와 발견이 이루어지는 건축이 바로 한국성을 연유하는 또 다른 하나의 한국건축의 정체성이 아닐지. 정통성의 문제를 한국적 건축에 결부시킨다면 결국 원조 따지기 밖에 안 된다. 아마도 그러한 피해 의식들 때문에 그 동안 우리는 한국적 건축에 대한 힘 있는 소리를 하지 못하는 시들함을 보여주지 않았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래서 방 소장의 건축은 한국적 전통에 고무되어 있는 공간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대한 문제로 읽을 수 있는 시나리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서의 문제가 어떤 거주 방식으로 승하고 있는 지를 연역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대담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것이 혹여 진부할 수 있는 한국성이라는 의제를 반복한 연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방 소장의 집들이 보여주는 것들이 결국 한국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상건축(ideal architectire) 0210
이일훈: 도시에 들어서는 다가구주택의 문제로 한정시키지 않고 좋은 도시는 대부분 좋은 건축이 채워지므로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의 도시들이 불량 또는 권할만 하지 않은 상태의 자본논리로만 채워지는 집들이 무수합니다. 그래서 방 소장님의 몇 년동안의 비슷한 프로그램들, 다가구주택들의 지니는 건강함 또는 작업의 성취도를 일단 긍정적으로 보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맨 처음 주택설계를 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방철린: 주택설계는 건축에 입문하고 3년이 됐을 때 친구의 의뢰로 청주에 지은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이후 주택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고 다루어보고 싶었지만 여건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공간연구소 시절, 공간연구소 사옥을 마치고 주택을 다루는 기회가 생겼었습니다만 도중에 중단 되어버리고 말았고, 정림건축에서는 대형 프로젝트를 13년간 다루다보니 주택같이 작은 프로젝트는 내 차지가 되질 못했어요. 그래서 늘 작은 프로젝트, 특히 주택건축에 대한 욕구같은 것이 마음 구석에 있었는데 인·토건축을 차리고 나서야 기회가 온것이죠. 그런데 몇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늘 조건이 여의치 않아 중단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연남동 스탭이 오랜만에 실현화 된 것입니다. 15년만의 일일 것입니다.
이일훈: 그러면 20년 전에 한 청주주택을 최근에 가 본적이 있습니까? 지금 존재하고 있나요?
방철린 : 친구가 그 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오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일훈: 15년 정도 주택 프로젝트를 접하지 않다가 설계를 할 때 제일 먼저 느낀 괴리는 무엇이었습니까? 건축가로서 내용상의 괴리,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방철린: 공간 연구소 시절은 중규모이하의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어서 작은 프로젝트 속에서 공간 나누기라든가 질서, 그리고 공간의 흐름 만들기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대형 프로젝트를 수년간 다루면서 스케일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은 변한 것이 없지만 대부분 공공 건축물의 공간구성 속에서 찾으려던 공간의 의미가 식구들이 사용하는 사사로운 공간으로 옮겨지게 되다보니 좀 더 가족적이어야 된다는 것과 이웃을 느끼게 해야한다는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야 함이 조금은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사용인수의 변화요소가 공간감을 조정하는데 약간의 혼란을 야기 시켰으나 곧 안정되었습니다.
이일훈: 지오폰티는 집을 하나의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건축가들 대부분이 건축가적 명성을 얻는데 많이 기여한 것이 주택작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집이 꿈인 것은 정말 꿈이고 실제로는 자본의 논리가 집을 좌지우지 합니다. 프로그램도 철저히 자본의 종속적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가구주택입니다. 방 소장님의 프로젝트를 포함시켜도 좋고 안시켜도 좋습니다. 다가구주택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 분명히 그것들을 분석하였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방철린: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다가구주택의 문제점은 경제원리가 상당히 크게 작용합니다. 다가구주택을 짓는 건축주들이 보통은 중하류급에 속해 있어 일생동안 번 돈으로 집을 짓는 수준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상당히 고귀한 돈이 집을 위해 투자되는 것입니다. 이 돈은 재벌이 자기 집을 호화롭게 짓는데 들어가는 많은 돈보다 물리적으로는 작은 돈이지만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더 큰 돈같이 여겨지리라 봅니다. 그런 걸 건축가가 환경을 위하여 규모를 줄여라 늘여라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원리에 맞아야만 집을 지을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또 한가지 문제점은 그런 분들이 애석하게도 건축에 대해서 이해를 잘 못해서 건축가를 찾지 않고 집장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사 현장사람 또는 자기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업자에게 접근하기 때문에 결코 성공적이지 못한 집을 짓게 만드는 원인을 스스로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집장사는 경제원리에 의해서 우선 이익을 추구하는 건축주의 셈본적 결과에만 초점을 맞출 뿐 그 집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눈에 보이는 장식적인 요소로 사람을 현혹해서 집에 들어가게는 하지만 실제 들어가서 사는 사람의 삶을 정신적으로 윤택하게 해주지 못하게 되는 것이 뻔한 결과이고, 그래서 다가구 주택의 입주자들이 결코 정신적으로 좋은 생활을 못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문제가 많은 다가구주택에 사는 인구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일훈: 그러면 환경적인 측면, 자본의 논리를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렇다치고 도시 또는 환경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철린: 일반적으로 다가구주택을 들여다보면 이 곳의 주거환경이 취약함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택의 반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로에서 방 특히 반지하 세대의 경우 채광과 통풍과 프라이버시 문제에 있어서 지극히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본권에 대한 해결을 제시해 주는 것이 우선 건축가가 기본적으로 해야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일훈: 다음으로 한 집에 여러 세대가 살게 되니까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도시 주거에서는 늘 이 부분이 문제 아닙니까? 처음에 작업을 하신「스텝(STEP)」시리즈는 공동성을 추구한다기보다는 각 유니트들의 독립된 어프로치나 프라이버시에 관심이 몰두해 있다가 하늘마당 시리즈에 와서는 내부로 집약화되는 경향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면 실증을 해보니까 좀 문제점이 많아서 그랬습니까?
방철린: 말씀하신 것 같이「스텝(STEP)」시리즈가 공동성을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스텝Ⅰ」을 설계할 때의 관심은 골목이되 실제 골목역할을 못하는 길, 골목이 있지만 차들로 그 골목을 다 빼앗긴 골목을 집안에 끌어들여 집 안에서 각 세대로 들어가는 사람이 그 분위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골목 속에 생활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폐쇄적이지 않고 공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것이 주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동체적 의식을 강조시키고자 함이지요. 계단을 삐딱하게 놓으면 벽과 계단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데 지하에서 위까지 뚫리는 공간이 생기고 그 사이로 사람의 시선이 오가면서 여럿이 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옥탑층에 세탁실을 두어 이웃끼리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프로치도 다양하게 각각으로 하지만 말씀하신 것보다 공동에도 신경을 많이 썼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왜냐하면 방 하나하나가 벌집 같은 분위기의 원룸이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면 남을 인식 못하게 되는 생활이 되어버리니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생활을 위한 의도로 계단과 복도와 세탁실 등 공동시설을 배치 했지요. 그러다보니까 좀 외향적이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너무 길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도로에서부터의 프라이버시를 어느정도 갖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고 외부와의 차단장치나 경계요소 등이 등장하게 된것입니다.
이일훈: 공동부분, 계단이니 복도니 하는 부분이 초기의 작업에서는 상당히 외부 지향적으로 열려있다가 요즘의 작업은 내부지향적으로 보입니다. 열려져 있는 것이 내부에서 주로 여는 방식으로 약간의 변화를 보이는데 그것은 입주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방철린: 집을 짓게 되면 아무래도 집을 짓고 난 후에도 여러차례 그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입주자들의 행동거지들 보고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이 공간에 대한 실효성을 검증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 중에 그들이 공간적 위계가 프라이버시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 완전히 개방되는 것보다는 약간의 프라이버시를 갖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일훈: 혹시 입주자들의 정서나 집주인의 정서가 초기의 개방적인 부분을 거부하거나 못마땅하게 느낀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까?
방철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건축주도 입주자들도 전혀 거부반응이 없었습니다. 단지「스텝」을 지어놓고 그것이 완전히 개방된 집이기 때문에 밤에 학생들이 계단 뒤에 모여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담배꽁초 청소를 해야 된다는 얘기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폐쇄적이어야 된다는 이유가 타당성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일훈: 입주자들의 사용경험을 분석하고 반영한 셈이군요. 현대건축이 비단 주거용도의 건축물 뿐만 아니라 도시에 들어서는 건축들이 많은 용적과 건축면적의 증가가 도시건축에서 필연적인데 그러다 보니까 자연 또는 건축의 내재적인 공간 활용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 하늘과 만나는 옥상부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관찰이 옥상의 활용도를 높이는 건축의 가능성을 한 스텝 한 스텝 올라가다가 결국 건축가 방철린이 하늘을 만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방 소장님께서 갖고 있는 하늘에 갖는 관심은 어떤 부분이고 또 어떻게 하늘마당에 접근이 됐는지 그 동기라고 할까 아니면 아이디어를 얻게 된 계기는 어떤 것입니까?
방철린: 우리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오감을 통해 세상을 느낄 수 있는 권리를 갖고 태어납니다. 그 중에서도 세상을 보고 숨을 쉬는 권리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다보니까 우리 인간은 이 기본적 권리와 관계가 있는 하늘·태양·신선한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가는 것 같아요. 조명이나 공기정화장치를 통한 현대생활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무위(無爲)의 개념을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화 즉 인위(人爲)적으로 만들어진 생활환경 속에서 피폐되어가는 인간의 정서, 잊혀져가는 기본권리를 되찾아 주기위해서 인간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하늘을 되찾아 주자는 개념에서의 출발이라 볼수있지요. 물리적으로 지상은 자동차에게 다 빼앗겨버리고 부지의 3면은 도시건축으로 빽빽히 들어차 있다보니 건축 속에서 자연으로서의 상징인 하늘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건축이 하늘과 접한 최상부라 보여지기 때문이며, 대부분 경제 논리에서도 이 곳은 아직 챙겨지지 않고 있으니 이 곳에 관심을 갖고 건축적으로 성숙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두 번째 생각은 우리 전통건축에 있는 마당의 개념의 도입입니다. 마당은 벽체와 바닥이 있고 하늘로 뚫려져 있는 아주 한정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 인간에게 제공되는 것들은 상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정원과 비교해서 얘기할 수 있지만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마당의 개념을 현대건축과 접목시키자는 생각입니다. 처음에 건축주의 반대에 부딪칠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하늘마당Ⅰ」이 완성되어 이사를 하고 얼마 안되어 눈이 왔는데 눈이 오는 바로 옆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너무 기분 좋았다는 건축주의 소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일훈: 소위 건축작품하면 대부분 형태를 많이 얘기합니다. 실제로 하늘마당에 쌓인 눈을 보고 집주인이 좋아한다는 얘기는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생활의 실제적인 풍요성을 높이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집주인 뿐만 아니라 입주자들도 그런 삶의 풍요를 누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다가구가 실제로 사는 사람수로 보면 세를 들어 사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하늘마당도 주인세대만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구경하는 건축가 입장에서 입주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흡연공간이라든가 아이들의 놀이공간, 혹은 이웃과의 대화공간 등 작은 숨구멍같은 공간이 최소한 한층에 하나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방철린: 좋은 지적입니다.「스텝(STEP)」에서는 그 점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모든 세대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하늘을 누리고 지하까지 모두 누리는, 선큰가든부터 지상까지 모두 통하게… 장소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활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오게 만들어서 오히려 그것을 억지로 누리게 하는 것까지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하늘마당」을 하면서 3층 이상에서는 주인이 살아야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건축주는 다가구주택을 세워 세를 받아 생활비로 쓰는 것은 도움이 되겠지만, 자기 땅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지상으로 올라간다는 생각 때문에 못내 아쉬워 했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나마 그런 장치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3층에 마당을, 그리고 1층에도 작은 마당을 만들어 장독대로 이용할 수도 있도록 하고 건축최상부인 옥탑층은 건축주의 귀속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주인이 개인주택에서 살지 않는 아쉬움을 달래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다가구주택에 사는 주거인에 대해서는 자연환경을 어떻게 하면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하마당을 만들어서 지하사람들도 마당을 밟고 햇빛도 즐길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중간층에서는 그런 여유가 나질 않아 좀 아쉽게 남는 부분입 니다. 그래서「하늘마당Ⅱ」에서는 계단 옆에 조그마한 발코니를 만들었는데 그 곳에 재털이가 놓여있는 것을 보니 약간 안심이 됩니다만「하늘마당」을 전체가 누리지 못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일훈: 특히 다가구주택은 입주자들의 패턴이 바뀔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방 소장님이 작업하신 것을 보면 내부의 가변성, 이 것이 전부 콘크리트벽식 구조로 되어 있어 대응력이 약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방철린: 「스텝(STEP)」을 설계했을 때와의 방의 면적과 하늘마당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스텝(STEP)」인 경우는 원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유니트가 크지 않아서 나누고 장치를 하는 것은 플렉시빌리티와 연관지어서 생각할 때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학생이 들어올 수도 샐러리맨이 들어올 수 있다는 -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튜디오로도 쓸 수도 있고 거실과 침실을 나누어서 쓰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플렉시빌리티 있는 평면구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하늘마당Ⅰ,Ⅱ」의 경우는 대부분 면적이「스텝」보다는 훨씬 커서 막아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일훈: 조금 더 연구해서 그 면적에서도 좀 더 효율적으로 나누어 쓸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해 봤으면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는 60년대에서는 주택공급률을 증가시킨 공로가 집장사에게 대단히 있다고 생각하는 건축가입니다. 그리고 공급의 질적인 문제에서는 비판을 받겠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공헌한 바가 큽니다. 실제로 서민들이 집을 하나 마련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많은 재화가치가 모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건축가가 작업을 한 결과들이 집장사들에게 많이 보급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급을 시키려면 권할 만한 규범으로 보이는 것이 있어야 되고, 이런 것들이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방 소장님이 생각하시는 다가구주택의 권할 만한 규범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방철린: 다가구 주택은 평범한 사람들이 한 집 안에 살도록 지어지는 집이므로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환경이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돼지가 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평범하고 지리한 삶을 보여주는 영화인데 촬영의 기교를 전혀 가하지 않고 사실표현만 중심으로 만든 좋은영화라 보여집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보여주면서 평범한 삶 속에서의 디테일을 결코 빠뜨리지 않고 보여주려는 노력도 그러하지만 지루해 보일 스토리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지루함이 없이 전개되어가는 이유가 생활의 우연성과 의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홍상수 감독의 탁월한 기법에 기인한다고 보여집니다. 우리의 다가구 주택건축도 그 영화와 공통점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기교가 넘치고 인위적 냄새로 가득 차 있는 집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왜곡없이 담을 수 있는 집, 그러면서도 생활 속의 근본적 생활조건을 빠뜨리지 않고 담을 수 있는 집, 그런 집이면 다가구주택으로서의 규범 속에 속할 수 있는 집이라 생각합니다. 집마다 대지의 조건이 모두 다르고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그 정신만 같다면 늘 다른 방법으로 규범의 표현이 이루어지겠지요.「하늘마당Ⅰ과 Ⅱ하늘마당 II」가 그렇습니다. 기본개념은 같으나 대지의 조건이 다르므로 생각을 담는 피상적인 공간 구조가 전혀 다릅니다. 권할만한 규범이라면 그것을 이미 지어놓은 평면의 형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일훈: 자연조건이든 인위환경이든 잠재력을 공유하도록 유도해야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방철린: 다가구주택 이용자는 보통 서민들인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 당하는 폐해는 최소한 없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건축가가 그런 부분을 연구하고 구체화해 봄으로써 규범적 요소를 찾아보는 것이 건축가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라 보여집니다.
이일훈: 그동안 작업한 것을 보면 재료가 몇가지로 한정되는 듯 합니다. 내부는 평이한 재료로 세련되게 구사하는 것을 제가 익히 확인한 바인데, 외부의 마감재료를 보면 구조재료로 주고 콘크리트를 쓰고 외벽단열 시스템 또는 약간의 철물들이 쓰입니다. 콘크리트를 주로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방철린: 콘크리트를 쓰는 것은 다른 이유보다도 콘크리트가 인간이 만든 인공재료중에서 가장 자연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컬러라든지 텍스쳐 등이 자연적일 수 있다라는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 또 그 재료가 강력한 구조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건축의 진실성이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거짓없이 건축을 표현하는데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은 점이라고 생각해서 노출콘크리트가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사용하려고 하는데 단지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후조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보니까 온도차가 심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단열재의 사용이기 때문에 하나의 방법으로 외부단열재를 사용하고 그것 자체가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한 집 만들기가 아닌가하여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저는 사실 조형이나 재료의 쓰임새보다는 집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공간만들기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재료가 거짓없는 재료라면 어떤 재료를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고 진실된 표현을 하는데 적합한 재료라면 다른 재료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일훈: 형태에 표현된 디자인의 방법을 보면 재료의 솔직성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제 생각은 재료가 솔직하게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은 재료의 성질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건축가가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기술성의 진보라든가 하는 부분으로 텍토닉 - 만드는 방법이라든가 또는 테크놀로지의 상향적 의지 - 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방 소장님의 하늘마당을 보면 재료가 철저히 장식으로 쓰이는 것이 아닌가 약간의 의구심이 듭니다. 일례를 들면 철골이 이유도 없이 들어가 있다든지….
방철린: 재료가 철저히 장식으로 쓰이는 것은 나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설계시부터 구조재로 디자인되어 쓰인 곳이 대부분입니다만「하늘마당Ⅰ」에서 원래 콘크리트로 설계되었던 부분인데 시공의 성공률을 감안하여 철골로 시공된 부분이 있지요. 그래서 그 부분이 장식성으로 쓰여진 것 같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구조재의 장식적인 사용에 대해서는 평소에 늘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이일훈: 젊은 건축가 김홍일은 하늘과 만나는 옥상을 제 5파사드라고 표현했습니다.
방철린: 저도 공감합니다. 마침 화두로 던지고 있는 것이 하늘이니까 제 5파시드와 하늘을 연결해서 보면 최상층의 장치들이 적극적으로 동원되고 있지 않은 아쉬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하였지만 최상층부는 건축이 하늘과 만나는 곳으로 사실 상당히 매력이 있는 곳인데 이 곳은 늘 버려지기가 일쑤이고 별로 챙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지의 바닥은 좁고 옆은 벽으로 꼭 막힌 도시공간에서 하늘과 만나는 이 곳은 설계 때마다 늘 버리기 아까운 부분이라 생각하지요. 그래서 천창도 만들고「하늘마당Ⅰ」마루를 깔아「하늘마당ⅡII」밤하늘의 별을 보며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잘 공개 안하는 작품이지만 역삼동의 한 다가구 주택에서는 퍼골라도 만들어보고 합니다만 늘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왕에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앞으로 집중적으로 연구를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일훈:「하늘마당 II」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공동게시판이라든지 집을 아주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사소한 부분이지만 애초부터 설계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정말 유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집주인 혼자 관리하는 것보다 입주자들 모두가 깨끗하게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이 공동체의식을 드러내는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방 소장님께서 공동체에 대한 어떤 사는 방식에 대해서 건축가로서 제안하고 싶은 방법이 있습니까? 굳이 다가구주택이 아니더라도 입주자들이 공동체로서 사는 방식에 대해 건축가로서의 생각….
이일훈: 기본적으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도 그렇거니와 말로써 의사전달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동물이라 하더라도 현대사회에서는 이웃과 단절된 생활을 하기 일쑤입니다.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단절된 벽을 허물고 사회적 동물로서의 가치를 발휘한다고 봅니다.「하늘마당이나 Ⅱ하늘마당II」에서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선 건축주가 옆집보다 좋은 집을 갖고 있다는 긍지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집을 잘 보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입주자들에게도 제안을 하는 등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런 관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이 있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공동체 환경은 잘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건축가가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해 주는 배려가 필요하겠지요.
이일훈: 저는 그 대목에서 하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게시판까지 섬세하게 디자인하는 건축가가 형태에 와서 왜 빗물이 튀는 것을 유리로 막고 다른 자동차가 주차하는 것을 체인을 설치하셨는지? 결국은 건축가가 잠재적 버릇인 형태의지가 너무 강한 것이 아닙니까?
방철린: 그것은 형태의지가 아닙니다. 벽체의 빗물턱이 높고 낮고가 형태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지하층으로 빗물이 튀어들어오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라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반지하 세대에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빛과 공기를 제공할 수 있을까라는 관심의 결과 벽체의 빗물턱을 조금이라도 더 낮추자는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일훈: 처음부터 유리로 하지 그러셨어요.
방철린: 다가구 주택에서 유리가 메인터넌스에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알루미늄을 쓴 것도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메인터넌스도 생각을 해야되고 빛이 많이 들어오게도 해야하고 외부공기도 많이 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의 결과이지요. 지난 여름 유난히도 비가 오랫동안 오는 바람에 입주자의 불편호소에 건축주가 막는 것을 제안했고 그래서 이 곳을 유리로 뒤에 시공한 것입니다. 주차장 체인문제는 시공자에게만 얘기한 것 같습니다.
이일훈 : 모든 것이 다 건축이다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세상에는 건축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건축가들이 많이 합니다. 방 소장님의 작업은 내적 성취도면에서 충분이 감동적입니다. 집장사들보다도 약 10퍼센트 정도 상향된 공사비로 굉장히 노력했고, 아마 다가구주택의 디자인 비용을 아무리 비싸게 받았다고 해도 적자일 것입니다.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다른 프로젝트에 스탭들을 투입시킬 수가 없으니까 그 노력에는 굉장한 찬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건축 자체에 갖는 관심은 굉장히 성취된 반면에 그 집의 앞과 뒤 즉 주변과의 관계성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변의 맥락이 특별히 반영된 것 같지도 않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려는 흔적도 안 보입니다. 그 부분이 아쉽습니다. 컨텍스트를 무시하겠다든지 하는 생각이 있습니까?
방철린: 강남에 있는 주거지라는 것이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 부분이 막혔느냐 뚫렸느냐는 정도의 개념으로만 파악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컨텍스트로 받아들이기에 주변이 너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주변과 어울리게 할 것이냐에 대한 생각을 가질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애석한 부분이지요.
이일훈: 작업량으로 봐서 스탭들이 현장을 매시간 쫓아다닐 수가 없었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현장과의 호흡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현장관리에 대해서 갖고 계신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방철린: 다른 것보다도 집 짓는 사람이 결국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여야 된다고 봅니다. 돈을 벌기보다도 시공자 스스로 시공을 잘 함으로써 좋은 집을 만들겠다는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집을 짓게 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설계자의 관심입니다. 매일 매일 시공상황을 체크하고 시공상태를 확인하며 모든 마감재를 스스로 골라서 전체적으로 통일감 속에 조화로운 마감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신경을 떼지 않는 것 - 이것이 두 번째 조건 아닙니까?
이일훈: 그 동안 대화를 통해서 방 소장님이 줄기차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건강한 건축가의 의식이 매우 유쾌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많은 잠재적 고객에게도 좋은 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몰두할 다른 화두를 찾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하늘마당의 연속적 발전도 좋고 제 3의 관심사여도 좋고….
방철린: 아까 잠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무위(無爲)에 대한 관심을 금방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현대인의 생활이 너무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생활하다보니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생각이 대두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도 인위적환경보다 무위적환경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우리 전통건축은 다분히 무위적 개념으로 지어져왔다고 보거든요. 자연을 보고 집을 안치는 관점에서부터 집안의 모든 공간구조와 디테일이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는 건축의 최상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아무래도 이 쪽에 관심을 계속가져야 될 것 같습니다. 몇 개의 다가구주택 프로젝트를 하면서 늘 불만족스럽게 끝나버린 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깊숙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 부분을 매력으로 포인트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이 분명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일훈: 스스로의 작업이 유형화되어서 또는 권할 만한 상태로 받아들여져서 많은 건축가들이 받아들이고 동참하기를 바라시겠죠? 극단적인 예로 집장사들이 건축가 방철린에게 설계는 안 맡기고 지금 지어진 것을 그대로 갖다가 비슷하게 따라해서 좋게 만든다면 건축가로서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방철린: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저는 굉장히 기쁩니다. 그것이 비단 제 생각을 따라준다는 사실 때문에 기쁘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가짐이 인간을 생각하고 자연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바람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히려 생각을 좀 더 깊게 해서 지금까지 제가 한 작업을 좀 더 발전적으로 이어받아 더 나은 환경을 만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이일훈: IMF 때문에 무진장 힘드실텐데 작은 작업에 젼력하는 것을 볼 때 반갑고, 새해 덕담 한마디 드리면서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무진장 큰 프로젝트에서 이런 개념으로 공동주택들이 속속 디자인됐으면 좋겠습니다. 디자인을 방 소장님이 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민현식 : 96년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게된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더욱이 이번 수상하신 작품이 요즈음 가장 말썽 많은 다가구 주택이란 점에서 의의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방철린: 감사합니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설계의뢰 받았을때 사실 고정관념속의 다가구주택 이미 지를 과연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건축주의 도움도 컸구요. 설계의뢰시 필요한기능만 이야기하고 모든것을 믿고 맡겼고 또 제 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민현식 : 우선 연남동 동네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 주시겠습니까?
방철린 : 처음 부지주위를 둘러본 결과 연남동은 인위적으로 개발된 도시의 다른 동네와 다를게 없었습니다. 도로와 택지 이외에는 주거지역으로서의 도시구조라서 특별한 공간구조나 형식도보이질 않았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존중을 내세울만한 아무런 흔적도, 공동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아무런 장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이 지역의 개발당시 이시대 우리의 도시주거지역은 무엇으로 충족되어져야 하는가가 미흡하게 다루어진 졸속계획의 결과라 보여집니다.우리의 전통적인 동네는 나름대로 그시대 생활패턴에 맞는 동네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훨씬 퇴보된 느낌입니다.
민현식 : 공동체에서 필히 가져야 할 도시적 건축적 요소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방철린 : 도시의 기본단위는 주거이지요. 개개의 주거가 남과의 커뮤니케이숀 없이 독립적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어떤방식, 어떤차원으로든 커뮤니티를 이루며 살아가지요. 매일보는 사람과의 교제, 얼굴을 아는사람끼리의 교제 그리고 지적 또는 사회적 무리들과의 교제가 그것입니다.그중 마지막 것이 도시적 스케일에서 이루어 지는것이라 본다면, 두번째는 마을안에서, 그리고 첫번째의 것은 자기주거와 접한 이웃과의 관계를 말한다고 볼수 있겠지요.「연남동 STEP」은 커뮤니티의 기본단위라 볼수있는 세번째 경우로서 여기에 적합한 교제를 위한 장치가 필요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커뮤니티의 기본단위에서는 조용히 다닐수 있는 산책로, 마당외에도 이웃이 모일수 있는 건축적 장치들이 필요하겠지요. 예를들면 공동세탁장이나 빨래널이터 같은것을 들수 있겠습니다.
민현식: 이 「연남동 STEP」에서는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실현하고 계십니까?
방철린: 「연남동 STEP」은 90여평의 대지에 200평이 채 안되는 조그만 주거시설이어서 지금의 국내법을 따르다보면 공동체적 요소를위한 공간확보가 사실상 힘든 형편입니다.이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필요로하는 실내기능을 제외해놓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축요소들을 골라 한곳에 집중시킴으로서 한정된 공간속에서 최대의 효과를 낼수있도록 구상했습니다. 이 건축물이 놓이게될 대지 주변이 갖고있는 도시적 여건이 각주거로의 진입체계와 이웃을 느낄만한 공동체적 요소들을 갖고있지 않음을 감안할때 도시와 주거를 잇는 중간 영역으로서의 건축적 요소가 필수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도시에서 주거에로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주고 완충역할을 어디에선가 담당해야 되기때문이지요. 도시에 있어야할 가로 또는 산책로를 대지내에서 건축물에 꼭 필요한 계단과 복도를 이용하여 건축적 방법으로 실현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입체화된 산책로는 한지붕에 사는 여러세대들을 묶어줄수 있는 대화의 장으로서의 역할도 하게됩니다.
방철린 : 이곳에 선택된 건축적 요소로는 계단, 브릿지, 복도, 발코니, 선큰가든 그리고 벽체이었고,빛의 도입도 중시하였습니다. 산책로는 지하 1층의 작은마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곳에는 내외부의 시선관입을 위해 넓은 창과 조각품이 있는 알코브등이 사용되어졌습니다. 1층에서는 지하층계단과 2, 3층으로 오르는계단 그리고 이부지 뒷쪽 동네와도 연결되도록 하여 집에 드나드는 모든사람이 한곳에서 만나도록 되어있습니다.입체적 산책로는 옥상으로도 연결되어있지요. 옥탑층에 공동세탁장과 빨래널이터를 배치시켜 이웃간의 교제를 좀더 적극화 시켰습니다.
민현식 : 삶이 바뀌면 도시와 건축이 바뀌듯이 후기 산업시대의 주거공동체는 어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며 그 생각들이 「연남동 STEP」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습니까?
방철린 : 오늘날의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는 농경사회나 공업중심사회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는것이분명합니다. 매일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접해야하고 지적 경쟁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해야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하루하루를 늘 바쁘게 살아가지요. 따라서 지적 공통성이 작을 개연성이 큰 주거의 이웃과의 대화보다는 도시스케일의 지적, 사회적 무리들과의 커뮤니티가 더 우선적으로 이루어 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해서 이웃과의 커뮤니티가 고려되지 않아도 된다는 이론이 있다면 반대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거주인에는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의 남녀가 포함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웃과의 대화부족이 결국 개인주의를 만연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농경사회에서 갖고있던 도시적 요소들 - 마을어귀의 느티나무, 공동우물, 빨래터, 좁은골목길 산책로 - 이런것들의 자리를 대신할 도시적 장치들이 현대도시에도 반듯이 준비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일건축물로 구성된 주거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연남동 STEP」은 가까이 있는 대학교를 겨냥하여 계획하였고 이곳에사는 사람들은 대개 타도시 출신의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 일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과 입체적 산책로는 이들을 쉽게 묶어줄 수 있을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민현식 : 소위 요즘 유행하는 「ONE-ROOM」은 천편일률적으로 Hotel방 형식입니다. 상기 질문과 관련하여 지역이 다르고, 입주 대상자가 다를경우 그 건축형식이 달라져야 한다면 여기서 그것은 어떻게 반영되어 있습니까?
방철린 : 「ONE-ROOM」은 두가지 성격을 갖고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ONE-ROOM」을 찾는 사람들의 무리가 어느정도 한정되어있는 구룹이라는 점에서 특수해적 성격을 띄었다고 보는것이죠.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대학생과 독신직장인을 상대로 했다는것이 그것입니다. 두번째는 개개인의 개성에 맞게 내부를 사용할수 있어야 되기때문에 일반해적 성격을 갖추어야 된다고 보는것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천편일률적인것같이 보일수도 있겠지만 생활에 필요한 기본설비를 콤팩트하게 배치시킨 것외에는 특수해적처리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독창적으로 공간을 사용할수 있고 또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면 가변적인 가구의 사용으로 방을 스튜디로도, 거실로도, 또는 단순한 침실로도 사용할수 있으며, 최상층의 경우는 둥근지붕밑에 다락이 있어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이곳을 침실로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특수해적 성격을 띈 일반해라고나 할까요.
민현식: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시한번 협회상수상을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