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건축에 입사한 건 1974년 겨울 공간사옥의 맨 앞 도로에서 가 까운 부분이 막 준공된 직후였고, 그 후로 2년쯤 시간이 흘러 다시 뒷 부분 증축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때 내가 담당자로 선정되었다. 당시 3년차라는 짧은 실무 경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4개정도의 프로젝트 를 강도 높게 끝낸 후라 어려움이 없었다. 겨울에 설계 기간을 거쳐 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겨우내 그린 도면은 그저 기본이 되는 틀에 불과할 뿐 모든 부분의 공간은 지어지면서 다시 조율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 건물은 설계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했다. 인터뷰 이후에 이야기를 듣겠다며 공간에 근무하는 후배가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가 최근에 나온 공간사옥 관련 책자에 스캔된 공간사옥 도면들(사인을 보니 내가 그린 도면들이었다)을 보여 줬다. 그러나 모두 실제 공간사옥과 다른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때 준공하고 나서 내가 잉킹했던 도면이 여러 해 동안 책자에 오르내리곤 하였는데 고 장세양의 신관 부분이 새로 지어진 이후 신관 을 포함한 새 도면이 등장하면서 원래 도면이 책자에서 사라졌다. 도면 없이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에 지어지는 과정에서 공간 건축물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바뀌는 과정에서 공간은 더욱 확장 또는 축소되면서 공간의 대비가 극대화되고 디테일이 살아나면서 질 높은 공간으로 탈바꿈되어갔다.
「SPACE(공간)」 1월호에 실린 공간사옥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그 곳을 부분 부분 완성해 나아갔던 사람으로서 정말 무거운 마음을 금 할 길이 없었다. 건축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열을 내면서 한결같이 공간사옥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하면, 공간사옥을 지켜오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왔던 공간건축의 입장, 그리고 사명감으로 출발하겠다고 나선 이 집의 구매자 아라리오 측이 앞으로 겪을 고초가 견디기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걱정. 이 모두가 풀기 어려운 문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들은 과연 어떻게 되어야 할까?
공간사옥의 용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김수근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일이 가장 합당하다고 본다.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고 김수근 선생이 쓰던 한 부분만 할애를 하여 기념전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공간사옥 전체를 모두 김수근기념관으로 꾸며 건축은 물론이고 생전에 이루었던 업적 전체를 기록하고 이와 연관 된 문화콘텐츠를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업적의 소상한 파악과 전시 방법의 특별한 연구를 거친다면 건축가 김수근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지속적인 건축 이벤트와 함께 문화적 강연과 세미나 , 건축영화 상영, 건축 관련 전시회 등을 기획하고 유치할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적 행사를 통하여 고인의 문화에 대한 열정 을 더욱 승화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아라리오 측의 성과가 큰 업적으로 기록되고 문화계는 물론 일반인들한테서도 각광받는 일이 되어 문화계에서의 아라리오의 위상은 상승곡선을 타게 될 것이다.
공간사옥의 보존의 정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어떻게 보존되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데 손을 들어주고 싶다. 보존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공간사옥의 원형 보존 이유는 공간과 공간의 구성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간 자체에 건축가의 사고와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를 변형시킬 경우 시간과 공간의 상관관계로 느껴지던 공간의 감흥이나 느낌이 변질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새로운 건축주는 미술관 용도로 바꾸면서 출입구의 위치를 탑이 있는 마당 쪽으로 변경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공간사옥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간사옥의 감상법은 큰길에서부터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골목을 걸어 오르면서 담쟁이 넝쿨로 휘어감긴 전벽돌의 차분한 모습으로 시작되는 사옥은 갑자기 터진 아치 안으로 펼쳐지는 높은 천 장의 마당과 그 위에 떠 있는 나지막한 현관 로비의 모습에서부터 평범치 않은 공간임을 느끼게 하고, 내림계단으로 이어지는 마당으로 들어가면서 시선 방향이 바뀌어 낮은 천장고를 가진 중간 영역을 거 쳐 탑이 있는 마당으로 연결되는 공간 전개에서 연속적인 감흥을 갖게 한다. 이 탑이 있는 마당은 공간사옥의 외부공간으로서는 핵심이 되는 머무르는 공간인데 일반인 출입구를 그쪽으로 낸다면 공간에 대한 감흥은 크게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출입구를 바꾸려면 현관문이며 그 주변들도 변형을 시켜야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공간사옥은 이렇게 하나하나의 공간도 중요하지만 흐름 속에서 펼쳐 지는 건축적 요소들도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그것을 바꾸게 될 경우 원래의 건축가가 생각했던 공간의 시나리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급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집을 지을 때부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부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사용하면서 변형시킨 부분도 원래의 모습으로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공간건축의 차후 조치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긴 사실 껄끄러운 상황이다.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감이지만 그 정신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이름을 유지하느냐 마느냐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다. 공간건축이 그나마 지금까지 공간사옥을 보존해온 것만 해도 공은 있는 것이고 경제적 위기로 다른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름을 연속적으로 가져가느냐 마느냐는 공간건축 자체에서 판단하고 처리할 문제이며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정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공간사옥의 현 상황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또 괴로운 상황으로, 아무리 옆에서 소망스런 방향을 제시한들 이제는 아라리오의 손에 달렸다. 오로지 공간사옥 소유주의 옳은 판단과 신중한 진행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2014년1월10일자 11:00KTV뉴스의 "김수근'공간사옥'문화재로 남는다."에 방철린건축가가 인터뷰하였다. 방철린건축가는 김수근의 공간 재직시절, 1977년 지어진 공간사옥 의 설계와 감리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때 설계도는 있었지만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고 현장에서 김수근 교수와 대화하면서 스켓취된 도면으로 건축물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감리수준이 아니라 1대1모형만들듯 목수와 같이 먹줄을 튕기고 벽돌쌓기를 감독하면서 집을 완성하였다 .
담쟁이덩굴에 덮인 검은벽돌건물과 도회풍의 유리건물, 그리고 한옥. 3자가 멋 떨어지게 어울리면서 창덕궁 전각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 우리나라 현대건축 최고의 걸작이라는 공간사옥이다. 건축계 1세대를 이끈 고 김수근(1931~1986) 선생의 대표작이다. 바로 뒤가 고 정주영 회장이 세운 현대건설 사옥.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건설 신화의 주인공이 한자리에 공존했다는 게 묘하다. 이런 인연 때문일까. 왕 회장은 공간사옥 인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원래 이 터는 김수근의 집이었다. 빚 때문에 경매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1971년 어렵게 완공한 게 지금의 구사옥이다. 공간은 후예들의 손에 두 번 진화했다. 그가 타계한 뒤 2대 대표로 공간을 이끈 고 장세양은 선배의 걸작 옆에 현대적 이미지의 유리건물을 붙여놓았다. 3대 대표인 이상림은 신구 사옥 사이의 한옥을 증ㆍ개축해 3세대 공존의 미학을 완성했다. 전통은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계승이어야 한다는 선생의 지론을 실천한 셈이다.
▲김수근을 빼고선 현대건축사를 설명하기 어렵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형인 건축가 김석철도 김수근의 지도를 받았다. 김원과 류춘수ㆍ민현식ㆍ방철린ㆍ승효상 같은 거장들을 키워낸 곳도 공간이지만 그 탄생에는 시련이 배어 있다. 부여박물관(1967년)의 왜색 논란이 그것이다. 후학들이 엮은 그의 수상록에선 “어머니도 고집부리지 말고 뜯어고치면 어떠니”라고 권유할 정도로 논란은 거셌다. 하지만 그는 “백제 양식도, 일본 양식도 아닌 김수근 양식”이라며 굽히지 않았다. 해프닝은 선생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었다. 김경수 교수는 ‘건축미학산책’에서 “자기 과시에서 돌아와 옛 정서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게 된 단계의 작품이 공간”이라 평한다.
▲공간은 걸출한 인재를 길러낸 산실이자 문화예술인의 교류 장소였다. 지하의 공간사랑은 김덕수가 1978년 사물놀이를 첫선뵌 곳이다. 공옥진의 병신춤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토록 유서 깊은 공간이 곧 공개 매각된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새 주인이 행여나 허물까 걱정스럽다. 유산을 잘 보전해야 문화를 축적할 수 있다. 건축계가 힘을 모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