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발전으로 현대는 지구에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최고의 문명시대를 맞고 있다. 특히 IT산업의 발전의 속도는 밀려드는 폭풍우와 같아 인간은 매일 매일을 꿈같은 일들이 현실화되는 새로운 세계 속에서 산다. 안경모양의 HUD(head up display)만 쓰면 허공에 디스플래이 된 루트를 통하여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거나 여행의 모든 예약을 마칠 수가 있는가 하면 증강현실 속에서 옷도 바꿔 입어보고 가구도 설치해보며 영화제작은 물론 건축물과 도시설계도 가능해졌다.
이진법의 디지털세계 이렇게 아쉬움이 없도록 새로운 세계를 맘껏 누리는 인간에게 문명의 이기는 좋은 일만 남겨주었을까? 이러한 새로운 세계는 분명 인간에게 유해한 부분이 제공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게임이나 인터넷에 열중하다 보면 시간의 인식이나, 옆에 있는 타인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계에 정신을 잃게 되고 이런 현상이 심화되어 중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상의 지속화 속에서 사람의 성격은 점점 바뀌어 독단적이고 급한 성격으로 변하게 되고 타인을 불인정하며 나아가 고독과 허무에 시달리게 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어 급기야 살인과 패륜행위를 자행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오랜 시간을 아날로그 세계에서 익숙해 멀쩡하게 있던 사람도 디지털세계로의 생활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디지털의 세계는 이진법으로 이루어져 있고 0과 1을 기본으로 한다. 디지털세계의 이진법은 ‘있다’와 ‘없다’의 세계이다.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이런 0과 1의 조합에 힘입어 깨끗한 영상, 깨끗한 음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예전, 스크레치가 기본으로 깔려있던 필름영화나 레코드판의 세계에서는 필요 없는 스크레치나 잡음은 제외하고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해서 보고 듣는 지혜가 있었고 이런 것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스크레치나 잡음은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늘 공존의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인정하여왔다. 그러나 디지털세계에서는 늘 깨끗한 영상이나 음악을 접하다 보니 영상의 스크래치나 잡음은 이제 있어서는 절대 안 되는 부정적 요소로 바뀌었다. 이제는 절대로 공존해서는 안 되는 극단적인 부정적 요소로 바뀌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서양보다 훨씬 전에 동양에 이진법이 먼저 있었다. 주역의 이진법이 그것이다. 주역의 이진법은 양효와 음효로 이루어지며 이 효가 6개가 모여 만드는 괘의 수가 64개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효의 기능은 양이냐 음이냐의 공존의 세계이고 선택의 세계로 우리가 살아왔던 아날로그세계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의 세계는 이거냐 저거냐의 세계가 아니라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의 폭이 한정되어 있어 여기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마음조차도 극단적인 생각으로 바뀌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 이런 생각도 있고 저런 생각도 있는 다양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생각은 옳고 다른 생각은 그른 생각이고 그래서 부정하고 없애버려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세계와 아날로그세계의 서로다른 성격 이렇게 디지털의 세계와 아날로그 세계는 서로 반대 급부적 성격을 가진 개념으로 대비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날로그세계는 전통을 중시하고 숭고함에 매력을 느끼지만 디지털세계는 신선함을 중시하고 시뮬라크르의 가치를 중시한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통상 느리고 모호함이 존재하지만 디지털세계는 빠르고 명료함만이 인정되는 세계이다. 또한 아날로그 세계은 정신적이고 이지적이며 관조의 세계에 빠지고 사물의 심오함에서 매력을 느끼는 반면 디지털세계는 다분히 물질적이고 감각적이며 직설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한다. 따라서 아날로그세계는 관계성을 중시하고 공동의 세계에서 포용력을 중시하는 반면 디지털 세계는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에 빠지기 일수며 극단적 행동을 무의식중에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세계에 대응되어 사람의 마음을 치유 할 수 있는 건축이 꼭 필요한 이유다.
비워냄의 건축 여기서 잠깐 노자의 허(虛)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노자는 ‘이 세상의 존재물 중에서도 큰 것으로 사람과 땅과 하늘과 도(道)가 있는데 그 중에 도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도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따른다’고 한다. 인위적(人爲的)이지 않은 자연의 상태가 가장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다. 노자는 또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비워내고 비워내서(虛) 고요한(靜) 상태가 되는 때 비로소 뿌리(根)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만물은 비워내고 비워냄으로서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고 이때가 가장 무위자연의 상태임을 이야기한다. 사람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로 가도록 해야 하고 이런 마음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면 ‘허(虛)’가 있는 건축 ‘허(虛)’가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건축십서와 팔아디오양식의 서양건축 이태리 비첸차(Vicenza)에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가 설계한 빌라 로툰다(Villa Rotonda)를 보면 서양건축의 뿌리를 눈치 챌 수 있다. 실제로 팔라디오는 당시 로마건축에 집중하였고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io)의 건축십서에 매료되었었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는 BC 1세기 유럽역사 변화의 주역이었던 로마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만들어진 책이다. 400여년을 이끌어온 로마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로마제국의 시대가 열리는 대 변환점에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헬레네건축을 기본으로 건축십서를 만들고 이 책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게 바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건축의 기본원리는 로마제국의 많은 건축물들의 균형 있는 디자인의 기본으로 작용하였다.
이 책이 1415년 발견되고 1480년경 다시 발간되면서 이 책에 영향을 받은 팔라디오는 비첸차에 빌라 로툰다를 비롯한 많은 건축물들을 짓게 된다. 그가 많이 사용하는 건축요소는 로툰다 중심의 단순하고 대칭적인 평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기둥이 받치고 있는 페디먼트의 변화무쌍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조형성이다. 그의 건축수법은 이후 팔라디오양식이란 이름까지 붙여져서 수 백년간 유럽각지에서 재탄생되고 신고전주의의 기본이 되기도 하며 신세계미국과 아시아전역에까지 전파되어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콘크리트구조의 도미노형식에 힘입어 ‘자유스런 평면’을 구가하던 르 코르뷰제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도 배치형식에서는 팔라디오의 빌라 로툰다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책에서는 건축과 토목의 대하여 기술적이고 그리고 각론적인 부분은 다루면서 기본원리인 질서(Order), 배열(Arrangement), 균제(Eurythmy), 균형(Symmetry), 장식{Decor(propriety)}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건축이 어떻게 인간을 만나 작동하는가? 건축이 자연과 어떻게 대화를 하는가 하는 것에는 언급이 없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의식한 로마인의 우월성 표현 이외에는.
건축의 허를 찾아온 한국건축 반면 한국건축의 뿌리는 어떠한가? 한국건축은 분명 자연과 대화를 하고 자연의 지형적 생김새와 특징에 동화하며 나아가 자연과 일체화가 되는 건축물과 공간의 배치를 만들어 간다. 그리하여 인간이 공간에 들어갔을 때 그 공간과 자연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건축자체에 감동하기보다 건축과 자연의 어우러짐에 감동하며 건축자체의 숭고함보다도 자연 속의 공간의 숭고함에 감명을 받는다. 이것이 곧 한국건축의 뿌리다. 한국건축의 뿌리는 분명 조형적 질서나 균형에서만 건축을 찾으려는 인위적 방법이 아니라 자연 속에 녹아들어가는 무위의 방법으로 건축을 지어왔다고 본다. 즉 건축의 ‘허’를 찾는 것이 명맥을 유지해온 한국의 전통건축이었다고 생각한다. 패쇄적이지 않고 투명하고 막히지 않고 소통하며 급하거나 빠르지 않고 여유롭고 느린, 그리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건축을 추구하여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현대에 살지만 위에서 이야기 한 한국건축의 뿌리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여왔다. 이제 최근에 본인이 설계하고 지어진 건축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제주스테이 비우다(Jaeju stay Biuda) 제주스테이 비우다는 소수의 인원을 투숙시키고 쉬도록 하기 위한 소규모 머무름 공간이다. 제주스테이 비우다를 설계하면서 우선 건축주와 의견을 맞춘 것은 2000여평의 귤밭인 부지를 원래 지형과 원래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살린 상태에서 집을 앉히고 인위적인 조경도 될 수 있으면 최소화 하자는 것이었다.
현황측량을 자세히 하고 이 측량도를 기본으로 현장과 일일이 대조해 가며 집이 앉혀질 곳을 면밀히 조사하고 확인하여 땅의 형상을 바꾸지 않으려 온갖 애를 썼다.
계획을 하면서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던 중 제주도에 흔한 귤 밭과 함께 그 안에 있는 귤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 원래의 귤 창고 모습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의 모습이 나름 오랫동안 제주도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다는 점으로 볼 때 그 존재가치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또 하나는 제주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돌담의 모습이다. 돌과 바람이 워낙 많은 섬에서 밭고랑 사이의 돌담은 식물들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돌담의 엉성하게 쌓은 모습에서 제주도 사람들의 지혜가 발견된다. 돌담은 용도에 따라 겹담과 홑담을 쌓지만 겹담까지는 필요 없는 밭고랑의 담은 홑담이면서도 제주도의 강한바람을 이겨내게 하려 지혜를 내서 구멍이 숭숭 뚫리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라 생각했다. 돌도 적게 들고 공간도 적게 들면서도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 이 속에 자연과 소통하려는 지혜가 보이는 것이다.
건축의 원형으로도 느낄 수 있는 귤 창고를 얼기설기 제주도의 담처럼 쌓으면 소통의 개념은 물론 무작위적으로 생기는 공간을 상상할 수 있었고 이렇게 생긴 숭숭 뚫린 공간으로 제주도의 바다에서의 기(氣)가 집을 통해 뒤까지 연결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형식적이지도 않으면서 편안한 공간들이 여기저기 생길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하였다.
실제로 숭숭 뚫린 곳에는 여기저기 이곳에 쉬러온 이들이 아무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부정형의 공간이 생겨났다. 조망을 위한 창도 한 방향으로 만 뚫린 게 아니고 방마다 다른 경치를 다르게 생긴 창을 통하여 감상할 수 있다. 모든 객실에 이르는 계단과 각실의 구성요소들은 위치에 따라 다른 공간경험과 다른 느낌으로 느낄 수 있도록 차별화 하였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 감상을 위해 일부욕실과 다락방에는 천창을 뚫어 별과의 대화를 유도하였다.
매송헌(呆松軒) 주택인 매송헌의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 동네는 예전부터 석실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석실 서원이란 이름의 겸재정선의 그림으로도 남아있는 한강변의 경치가 수려한 곳이었다. 많은 집들이 들어서서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좋은 풍수지리를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한강의 한가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볼 수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부지의 남쪽과 동쪽으로 들어선 집들과 북측과 서측에 있는 뒷집들의 높은 축대로 부지는 사방이 갇힌 상태로 되어 있었으며 강으로의 전망도 막혀 있었다.
이러한 주변상황을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부지는 소용돌이모양의 지붕이 요구됨을 알 수 있었다. 뒷집의 조망도 배려하고 매송헌의 꺼진 대지 의 단점도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적절 한 구성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경사진 지붕과 함께 그 아래로 따라 내려오는 천장을 가진 공간의 형상이 상상되었다.
실제로 변화있는 천장높이는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지붕이 감아 내려오는 마지막 남쪽부분은 루(樓)형식으로 하고, 집안으로의 진입은 루하진입(樓下進入)형식으로 감아 올라가서 마당과 만나고 이곳에서 거실로 진입하도록 함으로서 내외부공간의 유기적 연결이 자연히 이루어졌다. 가운데 위치한 마당은 집안소통의 중심이 되며 거실과 마당 그리고 루의 창을 열면 연결된 하나의 공간이 되도록 함으로서 비운 마당의 장점이 살아나도록 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단면 덕으로 맨 윗층의 방에서 한강으로의 전망이 열리게 되었다. 이방의 레벨을 좀 더 올리면 좀 더 좋은 전망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뒷집에 대한 배려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탄탄스토리하우스 파주출판도시내에 있는 탄탄스토리하우스의 부지는 T자형식의 도로와 접해 있으며 파주출판도시의 마스터 플랜상 집의 형상이 뒤쪽의 심학산과 한강의 그린코리더가 연결되도록 하기 위해 길다란 ‘창고’ 형상이 요구되었다.
마스터플랜의 요구대로라면 진입로에서 볼 때 좁고 긴 건축물의 좁은 모퉁이만 보고 진입을 해야 하는 형국이어서 이런 형상적 요구를 소화 하면서도 변화를 추구할 방법을 모색한 끝에 집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각도이 변화를 주어 진입하면서 보이는 건축물에서 시각적 변화와 함께 투시도 효과를 갖도록 하였다. 아래부분과 윗부분의 어긋난 부분은 베란다로도 사용가능하고 천창을 설치하여 갤러리 내부의 채광을 도울 수도 있도록 하였다.
건축물로의 진입은 도로에서의 바로 진입을 피하고 긴 진입로를 통하여 부지의 맨 안쪽으로 동선을 유도하고 건축물 안으로 들어서서도 건축물 전체를 감아 돌아 상부로 올라가는 동선 체계를 만들었다. 가급적 진입동선을 길게 하여 여유를 갖고 건축물 내부를 관람하며 다닐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이다. 이것이 건축의 허라 생각했다. 또한 1층에서 3,4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완만한 경사를 주면서도 계단공간의 인상적인 오름을 위하여 직선의 공간을 그대로 계단실 공간으로 만들었고 바깥쪽으로 면한 벽체에는 불규칙하게 배치된 다양하고 작은 창을 통해 빛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저기 만들어진 천창과 4층의 중간부분에 만들어진 종단으로 관통된 마당은 사각적으로 남북간의 소통을 꾀할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하였다.
마음을 비우고 비워내서 순리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집 지금까지 최근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몇 개를 보면서 ‘건축 –허찾기’란 제목의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직접 생활하고 지내야 하는 건축물들이 어떤 건축물일까? 이런 건축물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욕심이 가득 채워진 인위적인 집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비워내서 순리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집이 바로 허(虛)가 있는 집이고 이런 집이 사람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집이라 생각한다.
아래글은 건축가 방철린이 한길회의 연혁에 관하여 쓴 글로 한국건축계의 건축그룹에 관해 새건축사협의회가 발간한 건축과 사회 제25호 2013특별호에 실렸던 내용이다.
한길회
한양대학교 건축과 출신들의 모임인 한길회는 올해로 46주년을 맞았다. 한길회 역사는 46년이지만 한양대학교 역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에 세워졌으므로 한양대학교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현대화과정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한길회 회원들의 초기 멤버들은 파란만장했던 20세기 대한민국역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20세기 대한민국 역사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연속이었다. 1945년, 36년간의 일본으로부터의 핍박 속에서 해방을 맞이하기는 하였지만 반쪽짜리 정부수립으로 기쁨보다는 씁쓸함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속앓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완성되지 못한 반쪽의 독립과 자주의 기쁨을 찾는가 했더니 이도 잠시, 북한의 침공으로 전 국토는 폐허로 되어버리고, 국민들 마음은 온통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6.25전쟁이 끝난 이후의 혼란한 시기 속에서는 새로운 전기를 채 마련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 부패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1960년 4.19혁명이라는 젊은이들의 뼈아픈 희생이 요구되었고 이도 모자라 곧 이어 1961년 군사 쿠테타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군정시대가 시작되면서 극도의 가난함에서의 국가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문화보다는 산업의 발달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산업화의 성공으로 국민들의 주머니는 나아지고 있었지만 이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건축과 출신들은 문화에 대한 갈구로 목말라 하였다. 배는 불러졌지만 머리와 가슴은 여전히 비어있는 상태가 유지되니 무언가 이 문화적 욕구를 채워줄 돌파구를 마련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길회가 태동은 이때부터 준동되기 시작하였다.
이시기를 보냈던 한길회 선배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수십 년을 혼돈으로 일관해왔던 우리 사회는 5.16군사혁명 이후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으며 건축계도 예외일 수만은 없었다. 1963년 12월 16일 건축사법이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통과하자 곧바로 공포되었고 건축사시험에 대한 반발이 어느학교 출신을 불문하고 거세게 일어났으며 급기야 종로예식장의 대규모 집회에서 ‘건축동인회’를 결성 건축사 시험거부 운동에 들어갔다.”라고 60년대중반 건축을 전공한 젊은이들의 움직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이후 한길회의 태동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그 이후 건축에대한 대화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왔던 한양대 학교동문인 신 현대(1회 1952년졸업), 구 윤회(3회), 김 지태(5회) 등이 모여 건축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건축모임을 만들자고 발의하였으며 구 윤회의 발의로 「한길회」라고 모임의 명칭을 정하면서 한길회는 시작되었다. 곧 이어서 김 종옥(2회), 한 창진(4회), 안 기태(6회), 한 용섭(6회), 이 장복(7회), 유 경철(8회), 유 규성(8회), 장 석웅(9회), 이 흥수(9회), 김 일영(9회)등이 회원으로 등록되었으며 안 기태, 유 경철회원이 총무역할을 도모하였다.”
그때의 기록을 보면 한길회의 태동은 이 모임이 건축작품 활동에 필요한 제반지식과 정보교환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는 기대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어떤 건축적 이념이나 사상을 갖고 그를 실천하기위한 모임으로 시작 했다기 보다 혼란이 거듭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적 사회에 대한 엘리트적 반발과 건축가가 가져야 할 사회에 대한 문화인으로서의 정신과 청교도적 갈구 그리고 한국 현대건축의 미래에 대한 선구자적 걱정 등이 발로로 보이며 따라서 구체적인 이념을 앞장세워 건축의 진로를 표방 한다기 보다 건축가적인 자질을 배양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폭넓고 저력 있는 건축 활동이 한국건축의 미래에 이바지할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길회가 태동하기보다 더 이전인 1961년도경 9회 김 일영을 비롯한 몇 명의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그룹 활동을 시작하였다. ‘세미나건우회’란 이름으로 학생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매일만나 후배들을 교육하고 여름방학 동안에 합숙을 하며 설계공부를 하여 여름방학이 끝나면 이를 들고 밖에 나가 신문회관(지금신문회관 빌딩자리에 있었음)이나 조흥은행갤러리 등에서 건축 작품전을 매년 해왔었던 경력이 있었다. 68학번인 필자가 이 모임에서 10회 회원니까 한길회 시작시기보다 훨씬 일찍 많은 회원들이 학생 때부터 경험을 쌓아 왔었고 이런 경험을 쌓아온 사람들이 후에 많은 한길회 회원으로 편입 구성되었다. 세미나건우회 회원으로 한길회에 영입된 사람은 김 일영, 서 천식, 윤 석우, 이 특구, 류 춘수, 최 동규, 방 철린, 최 영집, 이 용선, 진 정, 조 인숙 등, 그 외에도 많은 회원이 한길회에 소속되었다. 세미나 건우회는 15회(조인숙) 를 끝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한길회 회원의 밑거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기록을 보면 본인이 입회(1992)하기 전 한길회는 대학교수들과 회원을 초청하여 토의나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건축에 대한 다양하고도 깊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교수와 회원, 회원 상호간의 우의도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원로교수인 박 학재 교수를 비롯하여 송 민구, 김 수로, 이 해성, 유 희준교수 외에 많은 교수들이 초청되어 주로 근대건축에 대한 초청강연을 하였고 자체회원이었던 한 창진, 안 장원, 권 태문회원 등이 주제를 정하여 자체 세미나를 가졌다고도 하였다.
한길회의 대표에 대해서는“회장이 없이 총무만 있는 모임으로 출발하였다. 회원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는 모임, 다른 모임보다 앞장서려는 마음이 아니라 남과 공존하려는 마음을 가진 모임으로 성장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래서 활동도 외부 노출적 활동이 아니라 내실을 기하는 내부활동 위주로 모임을 이끌어 나왔었다.” 라고 하여세상에군림하는 단체로 시작 했다기 보다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건축계의 문화수준의 향상과 건축이 사회발전의 모태가 되기 위한 초석이 되길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2년 회원이 늘어남에 따라 처음 한길회 정관이 탄생되었고 총무단이 활동업무를 보며 지속적인 활동을 꾸준히 진행해 오게되었다. 92년도 이전까지 활동한 총무는 김 지태, 안 기태, 한 용섭, 이 장복, 유 규성, 유 경철, 이 흥수, 안 장원, 김 한근, 이 문우, 이 후근, 김 춘웅회원 등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1992년 한길회 창립25주년을 맞이하여 회원의 활동상활을 서로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지면을 통하여 건축관련 연구내용을 발표할 수 있는 News Letter발간이 발의되었고 1992년 9월 29일 「한길회」창간호를 발행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한길회의 활동의 활성화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총무는 오 용부회원이었으며 편집위원장에 권 태문, 편집위원에 양 해윤, 최 동규, 방 철린회원이 활동하였다. 회원들은 News Letter를 통하여 건축계와 문화계의 변화를 서로 인지할 수 있었으며 회원들의 건축적 사고 와 활동상황에 대해 지면으로 발표할 기회를 갖게 되어 타회원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94년도부터 좀 더 적극적인 그룹 활동을 위하여 회칙도 만들고 활동범위도 넓히자는 제안이 나와 이를 위한 회의가 여러 차례 있었고 준비를 거듭한 결과 1995년 총회에서 그 동안 준비한 한길회 회칙과 회장제에 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 되어 초대회장에 윤 석우회원이 추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세미나 모임을 주 활동으로 일관해오던 활동에서 폭을 넓혀 국내외 문화유산답사가 실시되었으며, 인터넷홈페이지제작과 운영으로 활동의 포커스가 맞춰지고 또 확장되었다. 해남일대와 보길도답사를 시작으로 국내 많은 지역의 문화유산답사가 이루어졌으며 일본규수지방문화유산을 비롯한 인도네시아족자카르타지역과 발리, 일본 나오시마, 스페인, 일본의 문화유산과 건축 답사가 이어졌고 현재까지도 이 국내외 문화유산답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길회 30주년이 되던 1997년에는「한길30년」이란 책자발간은 물론 많은 건축가들을 초청한 가운데 학술세미나와 출판기념회를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가졌다. 이날 학술세미나는「한국건축의 국지성과 총체성」라는 제목으로 있었으며 발표 와 토론 및 진행자로는 류 춘수, 김 병윤, 정 진국, 유 건, 장 림종,방 철린 등이 담당하였다. 출판기념회에서는 한양대학교 이 해성 전 총장, 원 정수교수, 지 순교수, 강 석원 당시 건축가협회회장과 황 일인 부회장 그리고 목구회, 금우회 회원을 비롯한 많은 건축가들이 30주년과 도서출판을 축하하기 위하여 참석하였다. 기념책자인 한길30년은 1967년부터 30년 동안의 건축과 문화계의 큰 사건 그리고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 관련 사건들이 연대기에 정리되었으며 좌담, 논문 ,칼럼, 기행문과 함께 한길회 회원작품30여점이 수록되었다.
그 이후 양 해윤, 방철린, 김 병윤, ,최 동규, 박 경립 그리고 인 의식회원 순으로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우 경국, 조 인숙, 유 태용, 김 원식, 이 종호, 김 성홍회원 등의 도움에 힘입어 시대적 상황에 적절한 테마를 주제로 하는 국내외 문화유산과 명승지 그리고 회원작품 에 대한 답사와 세미나가 현장감 있게 이루어져 왔다.
2013년도에는 장학제도가 시작되었다. 2012년도부터 교수진회원들 사이에서 장학금제도의 필요성이 이야기되었고 정식으로 발의되고 결의되고 모금이 시작되었다. 모금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3년부터 이 장학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수혜자의 수가 적지만 시간을 두고 점차 수를 늘이기로 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학재 원로교수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박학재어워드」라 명명하고 1대 간사는 김 성홍회원이 담당키로 하였으며 심사위원인 방 철린, 인 의식, 이 종호 회원의 엄정한 작품심사결과 장학금수혜자가 우 지효핛학생으로 결정되었다.
한길회 초기의 회원은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건축설계를 하는 부류로 주로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축설계와 교수부문 그리고 건설분야와 건축 관련 업무분야에서 일하는 회원들로 폭이 넓어졌다. 교직에 있으면서 후배들 양성에 힘쓰는 교수진과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기 건축관을 피력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부류 그리고 건설 분야와 건축 관련분야에서 건설과 관련분야에서 성취도를 높이는 일에 전념 하는 경우다. 특히 앞의 두 부류는 학교와 건축단체에서 사회활동과 봉사를 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흐르고 회원수가 늘어나면서 특별히 자격을 정한 것은 없지만 건축전문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자를 우선대상으로 삼아왔고, 회원 입회는 정관에 따라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입회승인 절차를 거친 후 회원자격이 발생되는 것으로 원칙을 삼았다.
한길회가 46년의 역사를 갖다보니 벌써 유명을 달리한 회원의 수도 상당수에 이르고 세대격차 또한 많다. 이렇게 많은 회원을 보유한 한길회로서는 활동이나 여행은 꼭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활동과 여행을 통하여 회원 간의 연령 격차를 좁혀주고 서로를 알고 이해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길회의 단체 활동은 발기 초기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단체가 갖고 있는 건축적 사고나 철학을 표방하거나 이슈를 대외적으로 내어놓는 일을 한다기보다 회원 간의 모임 속에서 대화하며 내실을 기하는 일에 집중해왔다. 긴 역사가 있어 여러 세대가 같이 공존하는 만큼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여 개인적이고 외골수에 빠지기 쉬운 건축에 대한 철학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보다 지혜롭게 키워갈 수 있는 단초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 역할이 회원 하나하나에게 건축전문가로서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어 사회에 보다 양질의 건축문화를 전파하는 일원이 되기를 기대한다.
글 방 철 린
한길회 연혁 1962.1-2013.10.05
일시
내 용
회장
1962.1
5.16군사혁명 후 전국적인 사회구조재편과 각계의 제도정립 필요성에 따라 1962.1.20. 건축법이 공포되고 이어 1963.12.16. 건축사법이 제정되었고 건축계에도 필연적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여러 시행착오와 진통 끝에 1967년에 이르러 인정을 찾아 나가다 시작한다.
1964.9
건축사법에 따라 건축사시험이 발표되자 건축사시험 거부운동으로 각 대학연합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각 대학별 모임이 태동되기 시작하다.
1967.3
새로운 상황 속에서 동문간의 결속과 건축계 역할의 구심점을 갖는 모임이 있어야겠다는 공통분모를 지각하고 구윤회(3회) 안기태(6회) 유경철(8회)등이 중심이 되어 월례회 형식의 모임을 갖게 되니 한길회 첫 발자국이 이루어진다.
1968.3
경제발전에 따라 건축계의 역할이 증대되고 모임을 더욱 활성화 시키기 위하여 신현대(1회) 구윤회(3회) 김지태(5회)등이 발기인이 되어 건축을 이야기하는 모임의 틀을 잡고 구윤회 회원의 발의로 명칭을 ‘한길회’(큰길,한길을 걷고자 하는 모임)로 결정하다.
1969.3
김종옥(2회) 한창진(4회) 안기태(6회) 한용섭(6회) 이장복 (7회) 유경철(8회) 유규성(8회) 장석웅(9회) 이흥수(9회) 김일영(9회)등의 회원들도 함께 모여 건축에 관한 세미나와 건축에 관한 토론등을 하며 모임을 굳혀나가게 된다. 모임의 성격을 자유롭고 틀에 메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회장은 두지 않기로 하고 총무체제로 끌어 나가기로 한다. 초대총무로는 김지태, 부총무는 안기태, 유경철이 회모임을 주관하고 회원들의 동정를 살펴 연락하는 일을 맡아 수고하게 된다.
1970.3
EXPO'70이 오사카에서 열려 선진건축을 접하게 된다. 건축계의 새바람이 일어남에 따라 최창규, 이승우, 김수근, 송민구선생들의 발의로 한길회만의 모임을 가질 것이 아니라 도든 건축인들의 모임을 만들어 보자고 하여 한길회를 중심으로 구윤회, 안기태회원 등이 참여하여 논의하다 김수근 선생이 ‘100E'회라는 명칭을 제의하였고 뉴서울 호텔 대회의실에서 첫모임을 성대하게 가졌으나 확대 발전되 못하고 무산된다. 그러나 한길회는 회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건축계의 빼놓을 수 없는 모임으로 부상하였으며 한양대학교 건축과의 동문회 역할도 일부 감당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1971.4
비상사태 선포 후 집회가 자유롭지 못하던 때 어렵게 집회허가를 받아 문화공보부 시사실에서 송민구선생을 초청 ‘근대건축의 사조’라는 주제로 세미나을 가졌고 김수근선생의 후원으로 ‘黑部의 太陽’이라는 건설관계일본영화를 감상하였다. 회원 외에도 각대학교수,설계사무소소장, 기업체 임직원들이 다수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한길회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1971.10-82.2
오창희 ,선병택,유희준,박학재,홍붕희,이해성교수,최창규선생,이원균씨,김을규씨,초청 세미나를 하였으며 안장원,한창진,권태문회원 들의 발표를 꾸준히 진행함.‘
공간건축에 입사한 건 1974년 겨울 공간사옥의 맨 앞 도로에서 가 까운 부분이 막 준공된 직후였고, 그 후로 2년쯤 시간이 흘러 다시 뒷 부분 증축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때 내가 담당자로 선정되었다. 당시 3년차라는 짧은 실무 경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4개정도의 프로젝트 를 강도 높게 끝낸 후라 어려움이 없었다. 겨울에 설계 기간을 거쳐 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겨우내 그린 도면은 그저 기본이 되는 틀에 불과할 뿐 모든 부분의 공간은 지어지면서 다시 조율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 건물은 설계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했다. 인터뷰 이후에 이야기를 듣겠다며 공간에 근무하는 후배가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가 최근에 나온 공간사옥 관련 책자에 스캔된 공간사옥 도면들(사인을 보니 내가 그린 도면들이었다)을 보여 줬다. 그러나 모두 실제 공간사옥과 다른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때 준공하고 나서 내가 잉킹했던 도면이 여러 해 동안 책자에 오르내리곤 하였는데 고 장세양의 신관 부분이 새로 지어진 이후 신관 을 포함한 새 도면이 등장하면서 원래 도면이 책자에서 사라졌다. 도면 없이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에 지어지는 과정에서 공간 건축물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바뀌는 과정에서 공간은 더욱 확장 또는 축소되면서 공간의 대비가 극대화되고 디테일이 살아나면서 질 높은 공간으로 탈바꿈되어갔다.
「SPACE(공간)」 1월호에 실린 공간사옥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그 곳을 부분 부분 완성해 나아갔던 사람으로서 정말 무거운 마음을 금 할 길이 없었다. 건축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열을 내면서 한결같이 공간사옥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하면, 공간사옥을 지켜오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왔던 공간건축의 입장, 그리고 사명감으로 출발하겠다고 나선 이 집의 구매자 아라리오 측이 앞으로 겪을 고초가 견디기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걱정. 이 모두가 풀기 어려운 문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들은 과연 어떻게 되어야 할까?
공간사옥의 용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김수근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일이 가장 합당하다고 본다.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고 김수근 선생이 쓰던 한 부분만 할애를 하여 기념전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공간사옥 전체를 모두 김수근기념관으로 꾸며 건축은 물론이고 생전에 이루었던 업적 전체를 기록하고 이와 연관 된 문화콘텐츠를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업적의 소상한 파악과 전시 방법의 특별한 연구를 거친다면 건축가 김수근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지속적인 건축 이벤트와 함께 문화적 강연과 세미나 , 건축영화 상영, 건축 관련 전시회 등을 기획하고 유치할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적 행사를 통하여 고인의 문화에 대한 열정 을 더욱 승화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아라리오 측의 성과가 큰 업적으로 기록되고 문화계는 물론 일반인들한테서도 각광받는 일이 되어 문화계에서의 아라리오의 위상은 상승곡선을 타게 될 것이다.
공간사옥의 보존의 정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어떻게 보존되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데 손을 들어주고 싶다. 보존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공간사옥의 원형 보존 이유는 공간과 공간의 구성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간 자체에 건축가의 사고와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를 변형시킬 경우 시간과 공간의 상관관계로 느껴지던 공간의 감흥이나 느낌이 변질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새로운 건축주는 미술관 용도로 바꾸면서 출입구의 위치를 탑이 있는 마당 쪽으로 변경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공간사옥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간사옥의 감상법은 큰길에서부터 골목을 걸어 올라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골목을 걸어 오르면서 담쟁이 넝쿨로 휘어감긴 전벽돌의 차분한 모습으로 시작되는 사옥은 갑자기 터진 아치 안으로 펼쳐지는 높은 천 장의 마당과 그 위에 떠 있는 나지막한 현관 로비의 모습에서부터 평범치 않은 공간임을 느끼게 하고, 내림계단으로 이어지는 마당으로 들어가면서 시선 방향이 바뀌어 낮은 천장고를 가진 중간 영역을 거 쳐 탑이 있는 마당으로 연결되는 공간 전개에서 연속적인 감흥을 갖게 한다. 이 탑이 있는 마당은 공간사옥의 외부공간으로서는 핵심이 되는 머무르는 공간인데 일반인 출입구를 그쪽으로 낸다면 공간에 대한 감흥은 크게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출입구를 바꾸려면 현관문이며 그 주변들도 변형을 시켜야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공간사옥은 이렇게 하나하나의 공간도 중요하지만 흐름 속에서 펼쳐 지는 건축적 요소들도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그것을 바꾸게 될 경우 원래의 건축가가 생각했던 공간의 시나리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급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집을 지을 때부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부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사용하면서 변형시킨 부분도 원래의 모습으로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공간건축의 차후 조치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긴 사실 껄끄러운 상황이다.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감이지만 그 정신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이름을 유지하느냐 마느냐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다. 공간건축이 그나마 지금까지 공간사옥을 보존해온 것만 해도 공은 있는 것이고 경제적 위기로 다른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름을 연속적으로 가져가느냐 마느냐는 공간건축 자체에서 판단하고 처리할 문제이며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정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공간사옥의 현 상황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또 괴로운 상황으로, 아무리 옆에서 소망스런 방향을 제시한들 이제는 아라리오의 손에 달렸다. 오로지 공간사옥 소유주의 옳은 판단과 신중한 진행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뉴타운이 들어서기 전 구파발의 지도 - 왼편으로 개성 오른편으로 동두천과 연결되는 요지로서의 구파발 삼거리가 살아있다.
구파발 뉴타운이 들어선 이후의 지도-구파발 삼거리는 사라지고 구파발역만 남아 그 위치를 가늠케 한다.
사라진 구파발 삼거리
서울서부 경기도와 경계부분에 구파발이란 역사적인 동네가 있다. 이곳 구파발은 예전부터 한 반도의 서북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한양에서 한 반도 전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이 세가지가 있었는데 북서방향으론 평안도 의주로, 북동방향으론 함경도 경흥으로 그리고 남쪽방향으론 경상도 동래로 통하는 길이그 것이었다. 구파발은 그 셋 중 서북부의 의주로 통하는 길의 주요 관문이다. 이 곳에서 동남쪽으로 홍제원을 거쳐 서울 시내로 연결되고 지도의 '구파발역'이라 써 있는 곳에 있던 삼거리에서 오른쪽2시 방향으로는 의정부 동두천과, 그리고 10시 방향으로 파주, 개성을 거쳐 신의주와 연결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곳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파발꾼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전에 쉬면서 파발마를 갈아 타던 곳이고, 그 뿐아니라 역사 속의 많은 인물들이 이곳을 오고가며 잠시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는데 이런 중요한 역사의 장소였던 길과 삼거리 마을의 흔적이 뉴타운 바람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나중에 생긴 전철 환승역 하나만 덩그라니 남았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쫒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 곳에서 이전을 하였다. 고향을 두고 다른데 가서 사는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지만 여기 살던 사람들은 그나마 그리워할 고향마저도 송두리채 사라지고 없어 그리워할 대상자체가 없다. 지진 후에 일어나는 쓰나미를 무섭다고 하는데 뉴타운은 그 것보다 더 무섭다. 뉴타운이 휩쓸고 간 자리는 땅위에 있던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지워버리니 말이다. 쓰나미는 그래도 쓸만한 건축물과 길 그리고 다리 등... 역사의 흔적들은 남겨 놓는데.... 요즈음 불경기로 잠시 주춤하고 있긴하지만 역사를 밟고 새로 만드는 환상의 도시(?) 뉴타운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현대사회에선 멀쩡하던 사람도 언제 어떻게 장애자가 될지 모르고 어느 누구도 장애자의 경계 밖에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나라의 장애자를 위한 시설, 특히 장애인학교나 장애치료 이후에 이들을 사회로 되돌려보내야 하는 재활치료 시설, 그리고 그들이 일하며 생활하는 장애인 작업장 등은 시설이나 생활환경 면에서 아직 걸음마 단계다. 지난 5월 초 푸르메재단의 주선으로 독일 남부와 스위스 취리히 부근의 장애인 재활시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얻은 건축환경 면에서 재활시설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독일 회엔리트병원 복도 중간의 홀에서 바라본 광경. 디자인 잘된 병원의 수준을 넘어서 잘 디자인된 고급 호텔 안에 치료시설이 있는 것 같다.
식탁에 놓인 각양각색의 의자들
건축 속에서 신체장애자들의 불편함을 해소해주기 위한 장치는 그 하나하나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들이 하루 종일 움직이면서 살아야 하는 생활공간의 구성이다. 이는 여러 사람이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곳, 특히 장애인학교같이 통일된 행동을 해야 하는 곳에서 더욱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필수 이동수단인 휠체어를 교실마다 두어야 할 공간이 필요하고, 화장실 등에서도 상당히 많은 면적의 공간이 딸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취리히 장애인학교에는 시설들의 배치에서부터 단위별 교실과 복도 등의 구성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흔적이 보인다. 이 학교 식당에서 특별히 눈에 띄었던 것은 식탁의 의자이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종류의 의자를 몇 개 갖다놓은 것 같았다. 말하자면 같은 게 하나도 없는 장애인 개개에 맞는 맞춤형 의자인 것이다. 이 맞춤형 의자가 있기에 장애 부위가 다른 많은 학생들이 각기 몸을 가누고 앉아 있을 수 있다. 맞춤형으로 되어 있는 곳은 여기만이 아니다. 벨리콘재활병원의 병동에는 양손이 없는 환자를 위한 병실이 있다. 환자가 몸의 일부를 벽에 터치하면 문과 창문이 열리고 장비들이 움직이게 된다. 센서 장치가 벽의 곳곳에 내장돼 있는 것이다. 화상환자를 위한 병실도 있는데 환자 피부의 예민성에 대응해 병실의 온도, 습도가 별도로 자동 조절된다. 환자를 위한 대형 특별 욕실도 마련돼 있다. 욕실에는 높이와 수온을 쉽게 조절할 수 있는 욕조가 설치돼 있다. 이 밖에도 높이가 조절되는 작업치료실의 싱크대(취리히 장애인학교), 침대(바르타바일 요양소) 등 어떻게 하면 장애자의 불편함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만들어낸 첨단시설이 눈길을 끈다.
자세와 움직임이 불안정한 장애인에게는 언제 긴급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따라서 장애인 시설은 설계 때부터 보호감시의 사각지대를 가급적 줄이는 노력를 해야 한다. 또한 눈 깜짝할 사이에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급한 상황에서 구원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오스트리아 도른비른 양로원에는 바닥 가까이에 벨이 있다. 넘어졌을 때 이를 즉시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까지 안전장치를 두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조망과 자연조건을 감안한 공간 배치
△ 취리히 아동재활병원의 공동생활 공간, 벨리콘재활병원의 로비와 양팔이 없는 환자를 위한 병실의 센서, 취리히장애인학교 식당에 놓인 각양각색의 의자들.(위부터 사진/한겨레21 박승화 기자·방철린)
재활병원에서 중요한 부분이 작업치료다. 사회로 복귀하려는 장애자가 그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이 작업치료의 결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활치료 시설에서 장애자의 능력을 발굴하는 일과 그 능력을 프로급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벨리콘재활병원은 국내 병원과는 달리 분야별 작업치료 시설에 엄청난 면적과 시설을 투자하고 있었다. 물론 치료 관계인 수도 상응하도록 배치한다. 실제 작업현장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반복적으로 연습한 사람이 직장에서의 적응력이 높은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높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 작업치료 공간들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데, 취리히재활병원에는 지하에 시설들이 모여 있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늘 햇빛이 드는 중앙정원과 접해 있고 자연 통풍이 가능하다. 그래서 어두운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이번에 방문한 재활시설들은 공통적으로 병원이라기보다 호텔이나 스포츠시설과 같이 편안한 분위기, 내 집과 같은 안락함을 이용자들에게 제공한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음침하고 차가운 느낌, 오히려 병을 더 얻을 것 같은 살벌해 보이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휴양지의 호텔같이 안락하고 편안하며 어떤 걱정거리도 해소될 것 같은 분위기다. 회엔리트재활병원이나 벨리콘재활병원은 그저 호감이 가게 꾸며놓은 디자인 잘된 병원의 수준을 넘어선다. ‘호텔 같은 병원’ 정도도 넘어선다. 잘 디자인된 고급 호텔 안에 치료시설이 있는 것 같다. 나아가 건축적으로도 훌륭한 공간과 모습을 하고 있다. 취리히아동병원 재활센터의 침실은 거실, 식당을 겸비한 공동생활 공간으로 설계돼 마치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편안한 마음 속에서 재활의 꿈은 더욱더 빨리 커져갈 것 같은 분위기다.
법만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시설을 넘어
이 병원들의 동별 배치, 실별 배치를 보면 병원의 프로그램적 구성 개념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진입 부분에 노출된 공간, 부지의 조망 조건을 면밀히 검토한 방의 배치, 외관 구성, 자연조건을 감안한 외부 공간의 활용, 서비스의 용이성 등을 고려해 배치하고 있다. 회엔리트재활병원, 벨리콘재활병원에서는 우리나라 병원에서 지하로 보내곤 하는 식당이나 숍 등을 과감히 로비 정면 또는 로비 가까운 곳에 배치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병문안을 온 침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밝고 명랑한 호텔 로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특히 알프스의 경치가 빼어난 알고이 베르크바트 요양소에서는 수치료를 하는 풀장이나 운동치료실 등의 전면을 모두 유리창으로 설계해 알프스의 눈을 감상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값진 요소를 그대로 살렸다.
대부분의 시설들은 집같이 아기자기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늘 햇빛이 들어오고 정원이 내다보이며 발코니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침실 앞에는 사진과 이름을 마치 자기 집 문패같이 부착해 긍지를 주고, 부드럽고 친근감 있는 건축 재료를 색상의 조화까지 면밀히 검토해 선정하며, 침대에 누워서도 밖을 볼 수 있는 낮은 수평 창의 설치 등에 면밀함을 보인 도른비른양로원이 돋보인다. 각 층의 모이는 공간에 도시 중심가의 사진을 크게 붙여놓았는데 일상 생활공간과 양로원을 연결해, 평소에 늘 하던 생활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외부 공간을 연계해 적극 활용한 회엔리트재활병원, 외부 공간과 발코니를 작업장마다 넣은 카리타스작업장의 공간적 배려도 눈에 띈다.
방문한 재활시설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만들어지고 개선돼 완성도가 높아진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설들 하나하나에 깃들인 것은 정성이다. 법만을 만족하는 최소의 형식적인 시설이 아니라 신체적 재활과 함께 정신적 건강까지 다질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필요한 핵심적 요소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항상 이를 발전시키며 또 바꾸고 있기에 이러한 좋은 시설이 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재활시설은 머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재활인의 입장이 되어 이들의 마음을 가슴으로 읽고 정성으로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콘서트홀에서의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음악의 세계로 빠지는 즐거움 뿐 아니라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활력소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바쁘다 보면 콘서트홀을 찾을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힘든 것이 현대인들의 생활이고 보니 음악이 듣고 싶은데도 시간의 여유가 여의치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집이나 직장에서 CD를 들으면서 연주회의 분위기에 빠져 본다.
예전 같으면 턴테이블에 30센티미터가 되는 음반을 사용했지만 새로운 현대의 디지털 기술로 녹음되고 만들어진 CD로 음악을 듣는 것이 이제 새로운 일이 아니다. 머리를 식히려고 영화 한 편을 보려하면 반드시 영화관에 가야했고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로 영화를 감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DVD로 디지털화된 영상물을 집에서도 홈시어터 장비에 걸어 근사한 입체음향과 함께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생활요소들이 하나둘 그 자리를 디지털기술에 내어주게 되더니 이제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이 디지털기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폰뱅킹을 이용하여 은행 업무를 보려면 전화기를 들고 전화기 속에서 나는 여자 목소리 같이 상냥한 기계목소리의 안내에 따라 단추를 눌러 업무를 보게 되고 영화관이나 기차표 고속버스표 예약도 이런 기계목소리의 안내에 따라 처리하여야 하며, 엘리베이터나 버스, 전철 을 타고 내릴 때는 물론 운전을 할 때에도 목적지만 입력하면 내비게이션 화면의 지도와 함께 기계목소리가 아주 상세하게 길을 안내하고 이에 따라 운전만 하면 어디든지 목적하는 곳을 갈 수 있다.
청소년들의 음악을 들려주는 매개체도 워크맨이라 하는 미니녹음기나 미니CD플래이어가 구시대의 유물이 된지 오래고, 크기와 형상을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발달한 MP3를 이용하는 지금은 한 번에 저장하는 음악의 양도 또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하였고 이제 플래이어가 필요없이 디스크에 바로 이어폰을 꼽고 들을 수 있어 음악복제가 불가능한 디지털 디스크가 선을 보이고 있다.
현대인들은 매일 매일을 이렇게 격심하게 디지털시대로 치닫고 있는 격변기 속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디지털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의 심성을 보면 그 면모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에 의해 사람들의 사고가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격이 급해지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이해심과 포용력이 줄어들었으며 자기주장만 내세우려는 개인주의적 성격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을 디지털 세계 속에 파 묻혀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 치중해 왔던 과거와는 달리 매일 매일을 기계와 함께 살면서 사람의 속성과는 다른 기계적 속성에 영향을 받은 변화라 생각한다.
우리들이 이제까지 살아 온 사람끼리의 생활과 대화 속에서는 대명사로만의 대화도 가능하거나 명료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거나 설사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여도 또 간단한 손짓 하나로도 대의를 파악하여 그 뜻이 전달됨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사람들의 집단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이것은 명료한 명령어와 정확한 순서 그리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아야만 작동을 하는 기계류들과는 달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논리적인 속성, 명료하지 못한 속성, 그리고 감성적인 속성이 반대로 이런 대화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이지 못한 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뜻이 모두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콩 심은 데 콩만 나오고 팥 심은 데 팥만 나오는 기계들과의 대화의 세계와는 달리 콩 심은 데 팥도 나오고 감자도 나오는 것이 인간세계의 대화인 셈이다. 그러니 비논리적이고 애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지만 인간끼리의 대화에서는 포용력과 이해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인 인간이 정확성과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를 요구하는 디지털시대의 기계와 매일을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마음의 여유나 이해심이 없어지고 정서적으로도 점점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본다.
아날로그이진법과 디지털이진법
더 나아가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가 디지털시대의 근본이 되는 이진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디지털 이진법은 동양사상의 이진법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음양의 조합으로 구성된 동양의 이진법과는 다른 ‘있고’ ‘없고’의 개념 즉 0과 1즉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의 개념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이진법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개념상의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주역 계사상전 제 11장에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 라고 되어 있으며 대산 김석진선생은 주역강해에서 ‘태극이 만유의 본바탕으로서 만물이 나오고 돌아감이 모두 이로 말미암는다’ 라고 하고 ‘태극은 시공의 이치를 포함하고 있으니, 만물을 모두 포함한다는 공간적인 뜻과 처음부터 끝까지를 포함하는 즉 태초부터 궁극에 이르는 시간적인 뜻이 함께 있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동양의 이진법은 태극원리의 철학적 개념에 근거를 하고 여기서부터 발전하여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음과 양의 이치로 구성되어 있다는 해석과 함께 ‘조화’와 ‘공존’의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있고’ ‘없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디지털시대의 이진법은 ‘공존’이 아니라 ‘선택’의 개념으로 구성되는 커다란 개념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순해 보이는 개념적 차이가 이러한 이진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사고의 틀마저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레코드판은 플라스틱 성분의 동그란 판에 음악의 진동을 따라 홈을 파놓은 것으로 턴테이블을 돌려 바늘이 이 골을 지나면서 발생하는 진동을 증폭하면서 소리를 내는 형식으로 바늘이 이 골을 지나면서 음악소리와 함께 발생하는 잡음을 완전히 제거할 방법이 모색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들으려면 음악과 함께 나오는 바늘소리를 빼놓고 듣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아날로그시대에는 이것은 어찌 보면 음악소리와 함께 나오는 필연의 소리로 여겨왔다. 그래서 그 바늘소리가 있어 약간은 불편하다 했겠지만 이 바늘소리는 공존하는 소리로 인정을 하고 오히려 그중에서 음악소리만을 골라서 듣는 능력을 발휘해 온 것이 사실이고 어찌 보면 이것이 아날로그시대의 음악 감상법이었는지 모른다.
영화감상도 마찬가지이다. 영활필름이 깨끗할 때에는 덜 하지마는 조금 상영을 많이 한 필름으로 영화감상을 하려고 하면 소위 비 쏟아지는 것 같은 화면으로 영화를 감상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잡음이나 잡화면도 음악 감상이나 영화 감상 시 따라다니는 필연 물로 여기고 같이 살아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존’의 개념이 들어있는 동양의 이진법이며 아날로그적 이진법인 것이다.
서양의 이진법은 있고 없고의 개념에 의해 꼭 필요한 것만 선택적으로 사용을 하고 필요 없다고 보는 잡음 같은 것을 없애버리는 방법을 통해 명료함만이 선택되어 우리 귀에 들어오고 우리 눈에 들어온다. 선명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들만 받아들이다 보니 모든 선택도 명료해지고 생활도 또한 이러한 원칙에 따라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결정은 정서적으로 상당히 메말라 가고 이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마저도 이런 마음으로 보게 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전 같으면 상대방의 약점이 있어도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이해심을 발휘하고 또 이를 눈감아주며 장점을 살려 정을 나누고 살아왔었는데 이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방의 약점이나 단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 것이 이유가 되어 헤어지거나 상대를 제거해야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아날로그적 개념인 ‘공존’의 세계를 벗어나 디지털의 이진법의 원칙인 ‘제거하느냐 마느냐’의 세계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조금이라도 디지털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서 좀 더 인간적이고 정서적으로 메마르지 않은 정상적인 성격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생활을 하는 환경의 어떤 요소들이 혹시 이들의 사고전환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건축 속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도덕경의 허(虛)의 이야기를 잠시 해 보고자 한다. 도덕경에서 이야기하는 허(虛)에 대한 개념이 사람의 마음을 디지털적인 데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자세로 가게 할 수 있는 단초(端初)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허(虛)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其復 夫物芸芸 各歸其根
歸根曰靜 靜曰復明 復明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도덕경 제16장)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만물이 더불어 자라나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로다.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일컬어 고요함이라 하고, 또 이를 일러 제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제명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하면 천하가 귀순한다.
천하가 귀순하면 하늘에 들어맞고, 하늘에 들어맞으면 도에 들어맞는다.
도에 들어맞으면 영원할 수 있다.
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아니하다.
도덕경에서는 만물은 무엇이든 그 것을 완전히 비움으로서 그 것의 뿌리가 되는 근본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이런 상태가 곧 도에 들어맞으며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유지되어야 영원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완전한 빔의 상태를 허(虛)라고 이야기한다.
허(虛)의 회복을 위하여
‘허’를 우리의 자연환경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현재와 같이 오염되고 변질이 되어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균형이 깨져서 환경호르몬이 생기고 빙산이 녹아내리며 오존층에 구멍이 생기는 등 생물들에게 치명적인 환경을 제공하게 되고 생태계가 파괴되어 생물들이 온전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잘 못된 요소들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허’의 상태가 되어야 영원히 안정된 생태환경으로서의 온전한 지구가 유지 된다고 본다. 강이나 바다 산 등도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자연에서의 ‘허’다.
그렇다면 도시와 건축에 있어서의 ‘허’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 것이 존재한다면 그 것은 과연 어디에 담겨져 있을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청계천의 복원 이후에 서울 중심부 기온의 변화가 생긴 것도 그렇거니와 청계천을 찾는 시민의 마음이 풍부해 지는 것을 보면 서울시의 중심부에 ‘허’가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에 있어서 자연요소로서의 ‘허’다. 도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한국도시의 옛 모습 속에서 그리고 전통건축에서 우리는 많은 ‘허’의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발견된 많은 요소들은 디지털시대의 아날로그적요소로 현대도시나 건축에서의 ‘허’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천히 길게 SLOW & LONG
현대인들은 사이버세계 속에서 디지털기계와의 대화로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사실상 무의식 속에는 하루 종일 감정도 없는 기계음성과 대화해야 하는 허무함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더 아날로그적 경험을 다양하게 격을 수 있는 공간과, 이웃하는 사람을 가급적 많이 접촉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찬스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한국도시의 옛 모습 속에 있는 구불구불한 길과 모퉁이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가치를 발견하지 않았는가. 가급적이면 좁은 길 가급적이면 구불구불한 길이 건축물 내외에 파고들어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다닐 수 있도록 하고 길게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런 건축적 장치 속에서 현실세계 사람들과 서로 대화를 유도함으로서 고독한 시간을 가급적 줄여주어 사이버세계의 공허함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같이 사는 사람들 서로를 이해하며 의견의 공통영역 형성을 통하여 공동체의식에 젖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치로서의 공간과 장소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본다.
북이십일사옥과 교육과학사사옥 등을 비롯한 건축물들은 지하실에서부터 옥상에 이르는 계단과 통로에 다양한 변화를 줌으로서 건축물 내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을 될 수 있으면 많이 마주치도록 하였다.
불확정성 UNCERTAINTY
우리는 너무나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언어세계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로 규정해 놓은 공간 속에서 언어가 규정해 놓은 생활의 틀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파트 문화이다. 가치관이나 추구하고자 하는 부분이 무엇이냐에 따라 생활 속에 규정해 놓은 언어도 다를 것이고 행위도 다를 것이고 공간적 성격도 달라야 됨에도 불구하고 닭장 같은 똑같은 공간, 틀에 박힌 똑같은 언어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똑같이 틀에 박힌 생활을 한다.
사실 이런 틀에 맞춘 생활 이외에도 예기치 못한 불확정적 행위가 있을 수 있고 이런 불확정적 행위를 수용할 준비된 공간과 장소가 필요함에도 현대인들은 늘 이런 것을 감수하고 다람쥐 같은 생을 살아간다. 더욱이 사이버세계, 디지털세계 속에서 해 메는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은 더욱더 현실세계에서 멀어질 수 있어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풍부한 현실세계를 영위할 공간을 더욱더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기능적으로 역할이 분명하게 정해져 거실, 식당, 침실 등과 같이 실명이 정해진 서양건축과는 달리 한국건축은 남녀의 생활을 규정짓는 영역의 구분은 분명하지만 정지, 곡간, 마구 등과 같이 지극히 기능적인 실을 제외하고는 방, 청, 마당 등과 같이 고정된 기능을 벗어나서 불확정적 행위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장소적 가치를 가진 공간들로 구성된다. 이런 공간이 바로 디지털시대에 필요한 아날로그적 공간이고 건축의 ‘허’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본다.
건축 속에서 이러한 공간적 개념을 심어줌으로서 현재 또는 미래에 일어날 다양한 미지의 행위를 담을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될 것이다. 북이십일사옥과 교육과학사사옥의 경우 지하실에서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불확정적 성격을 가진 다양한 공간을 준비하였다. 스토리하우스나 서현동 스튜디오 그리고 도수리 주택에서도 이런 ‘허’의 성격을 가진 많은 공간들이 나타날 것이다.
투명성 SEE THROUGH
도시 속에서의 건축물의 자세를 어떻게 갖게 하느냐는 도시인에게 상당한 심리적 영향을 미치게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 속에 사는 사람들은 건축물의 숲 속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시선이 차단된 채 갇혀 살기 일 수다. 이 같은 상황이 하루 종일 높은 담이 쳐진 형무소에 사는 처지와 무엇이 다른가.
답답하고 좁은 개인의 공간에 갇혀 매일 매일을 컴퓨터와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도시인인데 컴퓨터는 발달하여 사이버 세계 속에서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생생한 경험을 오랫동안 하게 되다보니 사이버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이버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현실세계에서 행하려 하는 이른바 리세트(reset) 증후군이 뭇 현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런 일로 웃지 못 할 범죄까지 일어나는 현실을 우리는 감당해야한다.
이러한 병적증세에서 현대인들을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건축물을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으로 해야 함은 물론 도시적 폐쇄성도 가급적 제거시켜서 서로 소통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도시의 ‘허’, 건축의 ‘허’이며 디지털시대에 꼭 필요한 아날로그적 요소라 생각한다. 건축물의 입면 의 가운데를 비운 건축이나, 투명하게 처리한 건축물을 관통하여 건너편의 사정을 파악하고 서로를 인식할 수 있다면 인간은 좀 더 사이버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의 환원이 빨라지고 좀 더 인간적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심적 배려를 아끼지 않게 될 것이다.
교육과학사사옥은 정면의 통로부분을 모두 투명하게 처리하고 시선의 관통을 꾀하여 뒤쪽건축과 시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북이십일사옥에서는 복도부분을 동서방향으로, 그리고 스토리하우스에서는 최상층의 중앙부분에 하늘마당을 두어 남북방향으로 관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현동 스튜디오나 도수리 주택에서도 투명한 창을 통하여 같은 시도를 꾀하였다.
의외성 UNEXPECTEDNESS
건축에 있어서의 의외성은 도시인에게 신선함을 제공하는 위트이며 유머이다. 늘 같은 일을 반복하고 컴퓨터의 기계음성과 생활을 해야 하는 디지털시대의 도시인들에게 건축에 있어서의 의외성은 잠시나마 도시인 특유의 고독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디지털세계에 빼앗겼던 마음을 찾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건축의 ‘허’라 생각한다.
도로에 면한 교육과학사 사옥 중앙부분은 콘크리트 담과 개구부로로 구성되어 이곳이 이집의 대문 역할을 하도록 하였는데 사실은 양쪽에서 튀어나온 캔틸레버 벽체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두 개의 벽체는 중앙부분과 벽체하부가 떨어져있다. 마당일거라고 생각한 중정 에는 물이 있고 계단에 오르려면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캔틸레버계단과 삼층 난간상부는 바깥으로 캔틸레버는 의외의 요소로 읽히리라 생각한다. 북이십일사옥의 주출입구상부의 구조나 4층의 발코니, 3, 4층 외부로 튀어나온 계단 등도 같은 요소라 본다. 한국가드너사의 스토리하우스에서도 이런 노력을 하였다. 최상층메스의 삐뚤어짐, 1층에서 3층에 오르는 계단과 그 계단 좌측에 있는 동화캐릭터가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이런 작용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컴퓨터와 대화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니 다른 사람과 대화도 필요 없고 원고지가 없어서 사다 달랠 일도 없으며 어떤 스케치 북이 좋고 어떤 바둑판이 바둑 두기가 좋다는 정보도 필요가 없는 시대, 원고지며 스케치 북이며 영화필름이며 바둑판이며 모두가 지난 세기의 유산으로 박물관에 가야 할 시대가 되다보니 인간은 점점 더 디지털의 시대로 깊숙이 빠져들고 시간이 갈수록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할 시간이 짧아져 대화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고 인간의 공동체적 의식은 점점 더 배타주의나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시대에 사람의 마음을 되돌아오게 만들어주는 도시와 건축의 필수 조건으로서의 ‘허’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비로소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세상이 열리고 또 그런 세상이 지속되리라 믿는다.
Architecture in the City, Language in the Architecture
건축물을 계획할 때 나는 대개 두 가지 큰 관심거리로부터 사고를 시작한다. 하나는 도시 속에서의 건축의 역할에 관한 사항이고 다른 하나는 건축 자체에 관한 사항이다.
건축이 설 도시에 대한 관심
도시 속의 건축은 도시 문화와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건축이 존재하게 되면 그 건축과 관련한 이웃이 생기고, 따라서 그 건축이 도시의 일부로 읽혀지게 되며 자의든 타의든 그 앉음새나 모양새의 영향이 도시에 전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축물을 계획하기 전에 건축이 생기게 될 도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도시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까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도시의 역사와 도시의 구성 요소들을 비교 관찰하면 그 도시가 형성되어온 역사적 비밀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흔적 속에서 도시를 만들어온 국가적인 배경과 그 시민들이 어떻게 도시를 지켜왔는가 하는 정신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정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영향은 물론이고, 그 도시가 총체적으로 갖고 있는 경제적 여건과 국가나 도시를 정책적으로 이끌어가는 정치가나 행정가들로부터 시민 개개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식 정도 그리고 가치 창출에 대한 정책적 배려 등 그 도시가 걸어 온 길이 파악되는 것이다. 이렇게 쉽게 우리 눈에 비쳐지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도시의 경관도 철저히 역사의 산 증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천해온 많은 도시들도 숱한 세계 열강들의 침략과 그들의 문화 말살정책 그리고 근대화와 재개발이란 미명 아래 입은 훼손과 상흔을 포함하여 많은 역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작아보이는 건축도 그들이 모여 도시의 경관을 이루게 되는 것인즉, 그 하나 하나에 이러한 도시의 역사와의 연관성이 입력되지 않는다면 그 도시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변천을 거듭해온 한국의 도시들은 그 크기가 비대해지면서 도시에 대한 관심의 비중 또한 달라지게 되었고, 역사 속을 걸어온 도시는 경제 발전에 발 맞추어 새로운 도시 건설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만들어져 오면서 도시는 마취제를 맞은 듯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감각을 잃고 재개발의 메스에 의해 무절제하게 파괴되었다. 재개발의 수술에서 제외된 곳은 역사적 흔적이 다소 남아 있긴 하나 낡아만 가고 있는 도시는 아무 대책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역사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고 한 루이 알튀세르(L. Althusser)의 말처럼 역사 속의 도시, 현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도시 역시 항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산업 구조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관계에 따라 만들어지고 바뀌어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건축을 통하여 이렇게 점점 끊어져가고 있는 도시의 마지막 역사적 숨결을 이어가도록 노력하는 일 그리고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잠재력을 살릴 수 있는 건축가의 역할이 무엇인가 관심을 갖고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도시에, 그리고 도시의 역사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이해한다. 역사 속의 도시의 맥을 살려 미래의 가치 있는 도시 만들기에 전력을 해야 하는 의무는 건축가의 몫인 셈이다.
건축에 대한 관심사- 도시 속에서의 건축의 태도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시 속에서의 건축의 역할이다. 도시 속에서의 건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우선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건축의 도시에 대한 태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건축물이 세워질 도시에 대해서 건축이 어떤 태도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곳의 사용자들 그리고 그 건축의 주변인들의 도시에 대한 생각도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축이 도시인에 대해서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도시 속에서의 건축의 태도란, 도시에 생명력이 있고 건축물에도 생명력이 불어넣어져 도시와 건축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 볼 때, 이 건축이 도시나 사람을 대하는 입장이나 나름대로 갖고 있는 도시나 인간에 대한 관점이 어떠한 것인가라는 것이다. 건축물이 앉혀질 도시 속에 건축물이 도시를 어떻게 의식하고 앉아 있느냐 하는 자세와 그 건축물이 갖추고 있는 내.외부공간이 도시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도시와 건축과의 관계를 생명체간의 관계로 설정하고 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 믿는다.
이때 건축가의 입장이라면 도시의 문제와 건축 자체의 문제를 별도로 생각할 수가 없으리라 본다. 가급적이면 도시의 문제와 건축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시를 존중하는 태도를 하는 건축, 존재하는 목표가 뚜렷한 건축을 완성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 건축가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건축과 도시가 원하는 것을 면밀히 파악하고 이들이 원하는 대로 관계를 맺어주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믿는다. 도시와 환경에 도움이 되는 건축, 도시의 일부분으로 읽힐 수 있는 건축, 그러면서도 자기의 목소리를 조용히 내는 그래서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축을 향하여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건축에 대한 다음 관심사-건축속의 언어
다음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건축 속의 언어-즉, 건축 속의 공간 관련용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건축물의 공간을 구성할 때 보통은 미리 프로그래밍된 공간과 다이어그램화 되어 있는 기능들로 건축물을 구축해나간다. 그러나 이렇게 건축가가 알고 정해놓은 용어로 되어 있는 실명과 건축의 기능, 완전할 것이라고 믿는 교과서적 공간 언어들이 어쩌면 건축을 만들어가는 건축가들에게 큰 함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임마누엘 칸트(I. Kant)가 이야기하는 (선험적 주체)는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사유는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언어의 영향력을 주장한 훔볼트(K. W. von Humboldt)는 '언어는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갖는 민족정신의 외적인 표현'이라 하고 '언어(모국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구조를 제약하며, 그래서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건축가가 별다른 사고의 깊이 없이 건축 속에서 언어를 사용한다면 이렇게 사용된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축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 행동이나 사유의 범위가 엄청난 제한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산업 구조의 변천이나 시대의 변천에 의해 서서히 자주적으로 바뀌어온 언어를 건축가들이 사용하여 올 수 있었다면 '민족정신의 외적인 표현' 같이 건축가들의 사고가 그 사용 언어에 그리고 건축에 녹아 들어가 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해지겠지만, 타의에 의해 급격히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또 바뀌어가는 외래 문화, 현대 문화 속을 살고 있는 한국의 경우는 다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역사를 두고 익숙하게 만들어져 내려온 나름대로의 생활 패턴과 갑작스럽게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고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생긴 서구식 생활 패턴,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해가고 있는 현대 산업의 양상에 의해 바뀌어가는 생활 구조-이런 현대의 속도감 있는 변화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공간과 이에 상응하는 건축 언어에 민감하게 작용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한국인의 잠재 의식 속에서 한국인이 원하고 있는 공간 구조, 그리고 급변하는 현대 산업 구조 속을 사는 인간의 심성과 생활 패턴, 감성적 요소에 걸맞는 공간 구조를 찾고 언어화하며 이를 건축공간으로 구체화하는 일-이것이 한국 건축가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몫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