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항공기는 안데스 산맥의 준령 상부를 지나고 있습니다. 탑승객 여러분들은 왼쪽 창 밖으로 안데스의 만년설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평양에 면한 페루의 해운 도시이며 수도인 리마를 이룩한 지 40분쯤 지나서 기장의 기내방송과 함께 탑승객들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창밖으로 바로 보이는 해발 6천여m의 예리한 안데스 봉우리 설경은 탑승객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하다. 15분쯤 후 항공기는 잉카제국의 고도 쿠즈코(Cusco)에 도착한다. 쿠즈코의 해발고도는 3,300m, 경사가 급한 산맥의 한 가운데이고 보니 이들의 생활권은 일반적으로 해발 2천여m부터 4천여m - 그들은 이런 경사진 산허리를 오르내리며 생활하고 있다. 기압이 낮아 외지인들은 움직이기만 하여도 호흡의 곤란을 느끼지만 이곳 잉카의 후예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곳에서 생활에 열중한다.
잉카제국의 거석문화 이곳의 역사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3~4만년 전 아시아의 몽고계 인종들이 북아메리카를 거쳐 멕시코 지역과 이곳 안데스 지역으로 아주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BC9세기경의 차빈(Chavin) 문명을 모체로 여러 종족들이 흥망 성쇄를 거듭하며 독자적 문명을 유지해 나간다. 잉카제국은 1438년 이곳 안데스 지역을 광범위하게 통일한 최후 최대의 국가이다. 이들은 1532년 스페인의 피사로(Pizarro)의 상륙으로 멸망할 때까지 근백년간 표범과 인간의 혼혈신, 그리고 태양신 숭배를 근본으로 삼고 많은 석조도시, 성체들을 이곳 쿠즈코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 산재하여 건설하였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누구든 이들의 석조가공 기술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성채나 건축물을 짓기 위해 쌓은 석재는 집 덩이만큼 큰 것들도 있지만 돌과 돌의 틈이 칼조차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석재의 면과 면이 추호의 틈도 없이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의 공통점은 모두 지형을 절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특히 신분에 따른 주거공간의 구분과 용도에 따른 공간의 배분, 그리고 공간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적절히 조합하여 배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사가 상당히 급한 산지가 대부분이어서 테라스형의 경작지를 만들어 이곳 주식인 감자며 옥수수를 재배하는 것 또한 이곳 인디오들의 지혜이다.
잉카문명이 이렇게 세계의 유일무이한 특징적 거석문화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을 이들에게 문자와 철이 없었다는 것이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운송수단으로서의 바퀴와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한문과 이두가 쓰기 불편하여 이미 훈민정음이 만들어져 사용되어 있었으며 유럽에서는 기독교 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고딕건축과 르네상스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던 점을 비추어 볼 때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지구의 반대쪽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자대신 아주 원시적인 방법인 결구(마디)법으로 의사소통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운송수단과 철기가 전혀없이 거석을 정밀하게 가공, 운반하고 축조하는 기술은 경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잉카제국들의 정성스런 석조 유물들은 쿠즈코 주변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성채로서 삭사이와망(Sacsayuaman), 목욕탕과 샘으로 알려진 탐보마차이(Tambomachay)등...
쿠즈코 시내에는 스페인 침략이후 잉카제국의 인디오들이 생활하던 석조건축과 석조신전 위에 유럽의 주거 건축과 기독교 건축을 그대로 건축한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인도오들의 석조건축이 스페인 건축의 축대나 저층부처럼 그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어 스페인 인들의 문화 교체정책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길의 바닥석재와 길 중앙의 수로, 그리고 건물 하부의 석조건축의 흔적은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즈코시의 도시계획이나 건축물에 인디오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나 간파하기에 충분하다.
잉카인디오의 마을 - 오얀타이탐보(Ollantaitambo)
쿠즈코시에서 마추피추(Machu Picchu)로 가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면 잉카족들의 마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피삭(Pisac)마을, 칼카(Cal-ca), 우루밤바(Urubamba).... 오얀타이탐보라는 마을은 쿠즈코시에서 산길로 100여㎞ 떨어진 곳으로 이곳 인디오들의 옛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이 마을은 사다리꼴의 가로를 갖고 있고 현재 7,8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인데 처음에 구성되었던 마을의 형태가 지금까지 변치 않고 남아있어 인디오들의 생활을 잘 읽을 수 있다. 더욱이 이들 인디오들은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초기의 주거지에 그대로 살고 있어서 마을내의 수로, 길담, 그리고 그들의 집들에서부터 그들의 옛 체취를 그대로 느끼게 된다.
이곳 마을의 주거지는 놀랍게도 직선의 도로와 수로 그리고 담을 사용하였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좁은 계곡 사이에 위치하면서도 격자 형으로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점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여 지는 자연발생적인 부정형 마을의 형태와 대조를 이루며 상당한 도시 계획적 측면까지 고려한 인디오들의 준비성을 읽을 수 있다.
마을의 뒤엔 깍아 세운 듯한 산이 있고 산의 중턱엔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진 창고가 준비되어 있다. 이곳엔 찬바람이 분다는 잇점을 이용하여 썩기 쉬운 음식의 재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듯하며, 콩, 츄나(Chuna-얼려 말린 고구마), 양털구두, 담요, 코카잎, 무기, 그리고 의식 때 입는 무지개 및 의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다. 이들 창고가 갖는 보관의 뜻은 일시적 보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흉작이나 기근 또는 외적의 침입 등의 비상시에 대비한 영구적 보존을 의미한다. 스페인 침략시 상당한 시가전이 있은 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들은 이 창고의 보관 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 했다 한다. 스페인의 침략 후 이 창고는 스페인 인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말았으며 그 이후부터 잉카인들의 다시는 재앙이나 기근을 대비하는 보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중도시 마추피추
오얀타이탐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기차역에서 기차는 힘차게 부서지며 흐르는 황토빛물(우루밤바강)을 따라 방금이라도 물속으로 쏟아져 버리듯 철로를 아슬아슬하게 내려간다. 기차가 멈추고 여기서 마추피추에 오르는 소형버스를 타면 이 버스는 힘겨운 소리를 내며 깍아 지른 듯한 절벽 길을 지그재그로 오르고 마침내 공중도시 마추피추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곳 마추피추는 잉카제국 모두가 스페인에 침략 당했지만 끝까지 스페인들에게 발견되지 못하고 수 세기가 지난 1911년에서야 우연히 발견되었을 만큼 잉카 최후의 비밀도시답게 우루밤바강 대협곡의 접근 불가능 위치에 발견되었을 만큼 잉카 최후의 비밀도시답게 우루밤바강 대협곡의 접근 불가능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이곳에 오르고서야 알 수 있다. 이곳은 해발 2,400여m이며, 우루밤바강가 기차역에서 울창한 절벽 원시림을 버스로 올라온 길만도 수직으로 500여m이나 된다. 과연 수 세기동안 이곳이 발견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이곳 마추피추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도시가 아니라 완벽한 도시계획과 과학에 근거하여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시전체가 도시 기능의 성격과 지형에 맞게 구획되어 있다. 테라스 형 농경지와 도심이 긴 계단으로 구분하고 도심도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 신전, 사제 주거지, 왕족과 왕의 주거지, 일꾼들의 주거지, 형무소 등의 계급과 기능에 따른 영역은 중앙의 세계의 광장을 중심으로 분리, 배치하고 상호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죠닝되어 있다. 도시의 제일 높은 곳은 망투가 설치되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다. 분명히 산의 정상부임에 틀림없건만 샘물이 솟아나와 잘 다듬어진 석재 수로를 통하여 도시 내부를 아직도 흐르고 있음을 볼 때 잉카제국이 인디오들의 치밀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마추피추의 모든 시설들이 그렇듯이 주거의 모든 방들은 돌로 만들어졌고 상부는 우리나라의 초가와 비슷한 재료가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형태는 경사 급한 이등변 삼각형 형태로 취해졌던 흔적이 뚜렷하다. 당시 왕이 기거한 것으로 알려진 주거는 다른 시설들에 비해 비교적 신전에 가까우면서도 높은 곳에 위치되어 있으며 하인 그룹의 주거시설과 인접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어 이들의 생활 패턴을 짐작케 한다.
마추피추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도시계획이나 주거의 배치, 방들의 구성, 우리의 것과 비슷한 방 한가운데의 맷돌, 그리고 계단식으로 처리한 경작지 등, 모두 자연발생적 시설이 아니라 지형과 자연환경, 계급의 체계, 외적의 방어목적, 그리고 생활의 정신적 윤택함까지 모두 계획의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되고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글 방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