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통영에 출장을 다녀왔다. 오묘하게 생긴 땅 통영은 어딜 가나 갑자기 나타나는 바다와 맞닥뜨린다. 육지려니 하고 가보면 바다고 또 바다다. 그 뿐인가 바다 곳곳에 크고 작은 섬이 위치 하고 있어 장소를 불문하고 그림 같은 모습으로 사람의 시선을 빼앗고 마음을 빼앗는 환상의 도시이다. 박경리(소설), 유치환(시), 윤이상(작곡), 유치진(극작가)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이곳에서 탄생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내 받아 간 곳은 바다 건너 한산도가 길게 펼쳐 보이는 해변의 크지 않은 산. 송림이 울창한 곳에서 앞을 내다보니 그림 같은 배들이 풍경화를 만든다. 전망의 수려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이순신 장군이 첫 번째 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친 한산도대첩 바로 그 장소다. 의미 큰 역사적 장소에 서 있다는 게 설레고 짜릿하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풍전등화였던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나폴레옹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영국의 넬슨, 웰링턴 장군을 영웅 대접하는 영국인들조차 조선의 이순신이 더욱 위대한 영웅이라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요즈음 같이 어지러운 정국이 이대로 가단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조차 싫다는 지금 이순신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인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파도 마저 없이 잔잔한 남해 바다는 평화롭기만 하다.
1900년 한강철교가 세워진 이후 1917년 한강의 인도교로는 최초로 놓여진 한강대교(당시명칭 : 한강인도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한강철교를 짓고 남은 자재를 가지고 지은 것이어서 폭도 좁고(차도 4미터+양쪽으로 인도1미터씩)구조 형식도 그 당시 한강철교와 같은 프랫 트러스(pratt truss) 형식으로 추정된다.
이후 1925년 대 홍수로 용산 쪽 거더(girder)교 다리가 붕괴 위험에 처하자 폭을 넓혀 다시 짓게 되었고, 교량 건설 이후 노량진 쪽 발전으로 교통량 증가로 인한 수용부족이 계기가 되어 1937년 지금과 같은 리벳팅 타이드 아치(riveting tied arch) 구조인 왕복 4차선의 다리로 탄생 된 것이다.
6.25사변이 터져 북한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북한군 의 전진을 저지 시키고자 국군에 의해 폭파 되고 폭파 된 다리에서 떨어진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게 되어 임의 폭파했던 군 당사자가 사형을 당하는 등의 끔찍한 수모를 겪었지만 이후 1958년 재건 되어 본 모습을 되찾았다.
한강인도교로 불리던 이 다리는 1965년 제2한강교( 현 양화대교),1969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연이어 생기면서 제1한강교로 불리었고 교통량 폭주로 1981년 이 다리의 바로 옆으로 똑같은 형태의 다리(리벳팅 타이형식이 아닌 용접연결구조)를 만들어 쌍둥이 형태를 취하면서 8차선으로 늘어나고 이름도 한강대교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한강대교는 이제 우리의 문화유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수모와 아픔의 역사와 함께 했던 만큼 이 다리는 다른 다리와는 달리 우리와 같은 맥박이 뛰고 있는 것 같은 친근감이 있다. 한강의 다리 중에서 가장 앞선 시대의 다리이지만 후대에 지어진 다른 한강의 다리와 비교해 볼 때 경간거리 등 규모 면에서는 작아도 구조 미 적인 면으로는 우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리를 걸어서 건너면서 신과 구 두 개의 아치를 비교해 보는 것은 또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세조의 능이 있는 경기도 광릉은 조선 시대부터 숲을 비교적 잘 보존을 해온 덕에 헐벗은 산이 많던 옛 시절에도 숲이 우거져서 소풍가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나무가 많았던 덕에 국가에서 나무 종자를 관리하는 국립수목원이 들어서고 더욱 우량하게 길러진 탐스러운 나무들이 즐비하여 도시 생활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모든 걸 잠깐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 있는 좋은 명소로 거듭났다.
숲속을 걷다보니 문득 옛날 나무 없던 벌거숭이 산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6.25전쟁 후까지도 모든 산들의 나무는 너나 할 것 없이 베어다가 아궁에 넣고 밥을 하고 집을 따뜻하게 하는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 전후로 19개 구멍이 난 연탄이 공급되면서부터 도시는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이 줄어들었지만 도시를 벗어난 지역은 그대로 나무 땔감을 벗어날 수 없었고 여전히 산은 벌거숭이를 면할 수가 없었다. 1960년대 5.16 군사혁명이 나고부터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덤불 이외의 나무를 점차 땔감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전 국토에 벌거숭이 산을 없애자는 사방사업이 벌어진 것이다. 범국민 운동으로 매년 4월이면 전 국민이 산에 가서 나무를 심었었다. 특히 공무원과 학생들은 물론 조그만 단체들도 모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으로 산으로 나무를 심으러 갔고 정성스레 한그루 한그루 나무를 심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무를 심어놓으니 송충이가 득실거리는데 나라가 가난하다 보니 다른 구제방도가 없이 전 국민이 나무젓가락을 들고 일일이 송충이를 잡아야 했다. 수업을 빼먹어가며 매년 그 짓을 했다. 그 덕에 60년이 지난 지금 모든 산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였고 벌거숭이 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보고 있는 모든 산은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너 나 할 것 없이 정성을 들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산이고 숲이다. 그래서 더욱 값진 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시절 그렇게 극성스럽게 나무를 심고 관리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산들이 지금과 같은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있었을까?
글 사진/방철린/칸종합건축사사무소(주)/Bang,Chulrin/Architect Group CAAN/2019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