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에 가는 길에 구례 운조루(求禮 雲鳥樓)에 들렀다. 운조루는 호남 지방에 몇 안 남아 있는 주요 건축문화유산 중 하나다. 잠깐 들러 본 내용이지만 다른 주택과는 다른 특별한 점들이 눈에 띄어 몇 자 적어 보려 한다.
운조루는 문화 류씨 류이주(柳爾胄,1726-1797)의 자택으로 영조 52년 (1776년)에 완성되었다 한다. 류이주는 28세에 무과 급제 후 지방 수령이나 대규모 국가 조영 사업 책임자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가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집을 계획하고 현장에서는 아들이 감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두대간의 루트이자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인 노고단(1507미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산등성이 줄기는 평지에 가까워지면서 좌우로 갈라져 좌청룡 우백호를 형성하고 그 사이 부분이 완만한 경사로 내려오면서 혈(穴)이 만들어지는데 운조루가 그 중앙부에 자리를 잡았다. 운조루 1.6km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섬진강이 흘러 이 자리가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정면의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길은 동입서류(東入西流)의 도랑과 방지(方池) 사이를 따라가다 도랑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두 개의 명당 수로 풍수(風水)의 명당자리를 완성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여기 흐르는 물은 지리산에서 막 내려온 맑은 물로 수량도 많아 시원함과 함께 이 집의 넉넉한 인심을 예상케 한다. 이 다리를 건넘으로써 잡귀를 떼어 버린다는 의미를 가진 이 개천의 개념은 궁전 건축에서 많이 쓰였으며 운조루보다 50년 후에 창덕궁 내에 왕자를 위한 샘플로 지어진 연경당에서도 볼 수 있다.
영정조 르네상스 시대 건축답게 길게 쭉쭉 뻗은 건축물 형태도 시원스럽거니와 건축의 배치도 매우 독창적이다. 유교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에 남녀유별함이 있는 배치임에도 집의 공간구조에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전라 구례 오미동 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에는 현존하는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외에도 곳간채 곁에 안 사랑채가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대가 남자의 우월함만이 존재하던 시대였지만 드물게 여성과 2세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아들이 성장하여 집 짓는 일의 감독까지 할 때가 20세 성인이었으니 완성 후 사랑을 사용하게 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안채 동쪽에 있는 사랑은 누구용 이었을까? 부인을 위한 작은 사랑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지만 세 개 정도의 사랑채를 집안에 만든다는 발상은 찾기 쉽지 않은 예인 것 같다.
이 집이 사랑이 세 개나 되고 재실 등 다른 주택에 비하여 복잡한 실의 구성과 외부공간을 갖고 있는 대형 주택임에도 각 존의 독립성과 동선 연결의 유연성을 함께 해결 한 점이 눈에 띈다. 솟을 대문에 들어서서 왼쪽에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된 두 개의 사랑을 가진 기억 자형 사랑채와 오른쪽에 터진 미음 자형 안채를 겹쳐놓아 두 매스가 중복되는 위치에 배치된 중문간을 둔 게 독특한 배치다. 이 중문간이 집 전체를 소통시킬 수 있는 허브(hub) 역할을 맡도록 하여 복잡한 동선을 쉽게 해결하였을 뿐 아니라 시퀀스 상의 공간 전개의 다양한 구성을 만들고 있다. 하회 마을이나 양동 마을의 주택들, 해남 윤선도 고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독특한 방법으로 공간 소통과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공간 조직을 보면 류이주의 건축에의 조예가 남다름을 엿볼 수 있다고 본다. 못 본 부분도 많지만 갈 길이 바쁜 여정에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글·사진 : 방철린/칸종합건축사사무소(주)/http://mycaan.com
사랑 채에 대한 이야기를 써 올려 놓았지만 작은 사랑 채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다섯 번째 사진에 사각으로 찍힌 편액을 잘라서 포토샵으로 펴 보았습니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고교동기 박찬홍박사의 도움까지 청 하여 闇修齋(암수재)임을 확인하였지요. 숨어서 학문을 익히라는 교훈이 담긴 편액 이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아들을 위한 사랑채 임을 알게 하는 편액인거죠. 역시 제 추측이 맞았습니다. 작은 사랑채는 아들을 위한 사랑채였습니다.
작고 흐릿하지만 안채의 사랑에 관한 자료도 찾았습니다. 안채 사랑이 표현되어있고 "弄月O"라고 써있습니다. 여성 용 안채 사랑입니다. 부인들을 위한 사랑이 있었다는 후손들의 인터뷰 내용도 있더군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분명히 여성을 위한 사랑이 존재했었습니다.
류이주는 정조즉위 후에 정약용을 도와 수원화성 축조에 크게 일을 했다는 기록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