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방역으로 아이들 없이 보낸 설날. 성묘를 마치고 오랜만에 여주 신륵사엘 들렀다. 남쪽으로 여강(麗江)을 보고 있는 이 사찰은 높지 않은 위치에 있지만 전면이 터져 다른 절에서 맛볼 수 없는 시선의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는 특이함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숭유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능이 여주로 이전 되는 덕분에 영릉원찰(英陵願刹)이 되면서 규모가 커져 임진왜란 시 왜군을 물리치는 승병 역할이 매우 크기도 하였지만 반대 급부 적으로 사찰이 대부분 전화(戰火)의 수모를 면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언급 하였듯이 다른 절에는 없는 강변 의 기이한 바위 마암(馬岩)과 그 위의 강월헌(江月軒)이 있고, 또 전쟁 후 다시 지어진 조선시대의 절 집들과 함께 석탑, 전탑 등 많은 보물이 남아있어 하나하나 건축적 가치와 문화유산적 가치를 음미하며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변으로 나 있는 비 환경적인 도로나 강 건너 보이는 경치 등 비 전문가 적 환경 조성이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가까이 공포(다포)와 지붕 서까래가 보이는 전각이 극락보전으로 이절의 주 전각이다. 아미타경에 의한 불전으로 이 전각 안에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미타경은 서방정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서쪽에 배치하여 동쪽을 보고 전각을 안치는데 여강을 바라보게 하려니 자연히 남향이 되었다. 그리고 극락보전 앞에는 보통 안양루나 안양문 등을 배치하는데 저 앞 마당 건너에 보이는 루는 당호를 구룡루(九龍樓)라 하였다. 신라 진평왕 시절 원효가 이곳에 있던 연못에서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한 후 절을 지었다는 전설에 기반한 듯하다. 오른편 기와는 요사채 지붕이다.
사실 구룡루 전면의 분위기가 실제론 좀 어수선하여 마음에 안 드는데 강이 보이는 것이 좋아 앞으로 좋아질 것을 상상하며 올렸다.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다.화강암 기단부, 전돌로 된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가 깨끗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모든 층의 탑신에 비해 옥개의 돌출이 작아 비례적으로 소극적인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탑의 여섯 번째 층의 옥개 부분 위에 작은 탑신과 옥개같이 보이는 부분은 탑신과 옥개부분이 아니고 탑의 상륜부의 시작인 노반이고 그 위에 복발, 앙와 그리고 상륜이 올라간다.
이 부분 분위기가 이 절의 하이라이트 인 것 같다. 조선시대 지리서 택리지에도 저 강월헌과 절벽 마암 이야길하는데 그 밑에 용이 살고있다는 전설까지 이야기한다.
여기는 전화(戰火)로 없어진 듯한 빈터에 새로 지은 부속 절집이다. 일반 신도나 방문자들이 묵으며 수도할 수있는 템플 스테이다. 다소 커보이기는 하지만 소나무들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