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가을, 건축가 몇이서 바람도 쏘일 겸 여행을 하였습니다. 안동지역에 가면 늘 들렀었지만 돌아서면 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곳이 봉정사 영산암입니다. 예전엔 영산암에 이르려면 봉정사 오른편으로 나 있는 깊은 계곡을 내려 가야했고, 계곡을 건너 급한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 곳에서 우화루의 정면과 주변을 함께 보면서 여유롭게 진입을 하였었지요. 그런데 이 날 보니 마음 급한 스님들이 계곡을 가로질러 곧장 영선암 앞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계단을 오르면 바로 우화루 앞이니 쉽게 접근하는 편안함은 생겼지만 마음의 여유도 생각의 여유도 없이 목적지에 당도하게 되어 '진입의 맛'이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영산암의 모습은 예전과 비교해 변한게 없어 다행이었습니다. 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가운데 혹시라도 인기척이 스님 귀를 거스를세라 조심스레 응진전의 툇마루에 걸터 앉았습니다. 비 오는 가을의 영산암의 분위기는 한층 산사 다웠습니다. 가을 비에 촉촉히 젖은 마당의 비움과 마당을 중심으로 애워싼 지붕의 침묵, 그 밑으로 끊어질 듯 이어진 마루의 연결, 바깥으로 펼쳐지는 우화루의 열림 이 극적인 공간 속에서 스님들의 영상들이 나타나 산사의 풍경을 만듭니다. 알 수없는 애틋함이 가슴 속을 파고듭니다. 건축에 있어서의 허(虛)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