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죽파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면 푸실하고 유장한 전라도의 땅이 들린다. 그리고 귀를 통해 흘러가는 땅의 모습이 보인다. 땅은 넘실거리면서 잔망스럽지 않게 길게 가로로 흘러간다. 마치 가야금을 빌어서 땅이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전라도에서 태어나서 평생 전라도 땅에서 살았던 죽파의 손을 통해 나오는 음악이라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소리는 아주 명쾌하게 그곳, 땅의 성정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땅의 찰기를 잘 전달해 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땅이 직접 소리를 내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전통건축공간의 특징을 훌륭히 되살린 건축가 방철린의 ‘미제루’. 사진출처=www.mycaan.com
땅이 인간으로 형상화되고, 소리로 형상화되어 고유한 문화가 되고 독특한 냄새와 빛깔이 되어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우리는 전통이라 말하며, 한반도라는 특정한 장소 위에 입혀진 문화를 우리는 한국성이라고 말한다. 가야금산조라는 장르가 만들어진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재료와 그 재료로 특별한 ‘무엇’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손을 거쳐 한국만의 독특한 성질이 드러난다. 그 소리는 참 편안하고, 소화가 잘 된다.
“나는 당기고 풀고 하는 맛에 이걸(가야금 연주) 하지.” 그 소리를 누군가 명쾌하게 정의해주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가야금 명인 이 사람 저 사람을 훑다가 이름도 모르는-함동정월도, 김죽파도, 성금련도 황병기도 아닌-어떤 기가 막힌, 이를테면 언더에서는 알아주는 명인의 괴팍하다는 연주를 들려주고는 ‘그 사람이 그럽디다’류의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당기고 푸는, 긴장도 이완도 아닌 그 묘하게 흥이 나고 어깨를 움찔거리게 하는 그 소리….
혹은 창평 식영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썼다는 자미탄 앞에서 멈칫 솟아오른 언덕 위의 식영정으로 올라가는 조금 가다가 휘어지고 조금 가다가 휘어지고 마치 담양 창평 너른 들 옆에서 쑥쑥 자라는 대나무가 낭창낭창 휘어지듯이, 혹은 휘∼잉, 휘∼잉 바람소리가 들릴 것처럼 길이 휘어져 가는 그 맛이 이 땅의 소리이고 이 땅의 흐름이다.
#한국의 멋, 한국의 맛에 대한 오해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오해….”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에서 주인공 알리사는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끝내 현실의 사랑을 포기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끝을 맺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알리사는 사랑하는 제롬보다 종교의 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건 오해라고, 지드는 펄벅이 아니라고-그런 계몽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고-프랑스의 유명한 평론가 R.M. 알베레스는 이야기한다.
그는 지드가 남긴 모든 육성을 다 모아서 읽고 듣고 분석을 하고는 마지막에 결론을 낸다. ‘좁은 문’은 실패작이다. 지드는 알리사의 ‘도덕적 영웅주의’를 이야기하려고 하였는데, 그게 그만 잘못 전달되고 엉뚱한 데서 “빵” 터지는 바람에 ‘좁은 문’의 알리사는 그런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말할 때 꼭 인용된다고…. 지드에게는 가장 실패한 소설이 가장 유명한 소설이 된 셈이다.
세상에는 오해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한국성 혹은 전통…뭐 그런 단어들도 편의주의와 상업주의와 무엇보다도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오로지 소비와 소화만을 즐기는 많은 ‘문화시민’들에 의해 아주 전망이 그럴듯한 사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개량한복을 입고 있으면 전통이 계승된다 믿고 있거나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빳빳한, 손이 베일 것처럼 빳빳한 한옥을 지어놓고 어울리지 않는 풍경 달아 놓고 전통을 운운하는 것까지 세상에는 무릇, 어마어마한 오해가 공기와 비슷한 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한국성이란 무엇인가? 한국성이란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백남준은 나는 한국 사람이고 내가 하면 한국적이니라…, 라고 1984년 성대한 잔치를 주관하시곤 일갈했다. 나는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간혹 맞는 말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모두에게 고르게 적용되는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 같은 보편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 그렇게 안이하게, 비스듬히 누워서 먼 발치로 떨어지는 것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일본의 조경학자가 우리나라에 왔었다. 회의 참석차인지 신사유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식적인 업무를 마친 그에게 주최 측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을 보여준다고 창덕궁 비원으로 데려갔다. 한 바퀴를 돌며 실컷 보고나서 그 일본인 조경학자가 “그런데 정원은 언제 보여줄 건데요?” 하고 물어봤다고 한다. 꽉 짜인 조형성의 극치를 달리는 일본정원만 본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살짝 기댄 한국의 정원을 보여주었으니, 그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많은, 철저히 한국적인 어떤 것들이 모두 그렇다. 한국의 미, 혹은 한국 전통의 맛은 도통 알기 어렵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단정해야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것을 들고 나와서 한국적입네 하여도 도대체 반박을 할 수 없다. 다만 혀로 손으로 더듬어보아야 할 뿐인데 마치 김치 맛처럼 그 맛을 맵다고도 시다고도 달다고도 할 수 없는 다차원의 복합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그래서 오용도 생긴다.
#충실한 형태의 재현도 전통에 대한 예의
강봉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던 국보건설단이라는 설계사무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없어졌다.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가 투명해진 것이다. 그가 왜 사라졌을까? 이유는 그가 그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덜컥 경복궁 동북쪽 모퉁이에 새로 짓는 국립박물관 설계를 맡았고-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이 바로 그 건물이다-, 그는 법주사의 팔상전과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를 섞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한국건축의 상징적인 형태를 섞어서 만들었다.
그런데 그 설계가 화근이었다. 그 건물이 ‘희대의 문제작’, 혹은 ‘시대의 문제아’가 되어 그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물론 그게 순수하게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런 지침을 준 정부 등 의사 결정에 관계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마구 섞여진 이종교배의 산물이긴 했지만, 그는 온갖 한국건축의 상징들을 직설적으로 붙여서 마치 ‘움직이는 성’처럼 생긴 높다란 기와집을 설계했다. 그러나 그 성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강봉진이 움직여야했다. 온갖 매체와 온갖 건축가와 온갖 주변 사람들이 한마디씩 해대는데 당해낼 사람은 없다. 강봉진은 사라졌다. 전통, 혹은 한국성은 그 정도로 휘발성이 강하고 더불어 폭발력이 엄청난 위험한 것이다. 혹은 위험한 것이다.
건축가 김수근 역시 한국성이라는 다루기 힘든 야생마 같은 대상을 겁없이 올라탔다가 크게 엉덩방아를 찧은 경우이다. 한국전쟁 때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하여 공부하고 30대 초반에 귀국하여 이른바 정권의 실세를 등에 업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을 소화하던 김수근이 부족한 공부를 ‘천재적인 직관’으로 메우며 “한국성이란…” 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부여박물관이었다. 이른바 ‘왜색논쟁’. 누가 봐도 아닌 것을 맞다고 우기다가 결국 큰 상처를 입었다.
◇한국건축의 계승을 공간의 문제라는 의제를 제기한 승효상의 ‘수졸당’. 사진출처=www.iroje.com
1967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에 ‘부여박물관건축양식에 말썽’이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기사에는 ‘일본 신사와 같다, 설계자 측에서는 백제문화 고유의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등등의 내용이 일본 신사의 ‘도리이’와 비슷한 박물관 입구라는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다. 이것은 곧바로 각계의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켜서, 8월 24일자에는 김철준 교수가, 26일자에는 홍이섭 교수가 각각 ‘식민지잔재’ ‘망령적인 축조’라고 맹렬히 규탄하는 글을 올렸고, 급기야 중앙일보 9월 2일자에서도 ‘건축양식으로 시비 된 부여박물관’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자의 주장과 각계의 소리를 싣게 된다.
당시의 논란은 점점 확대되어 조사위원회까지 꾸려졌고, 결국은 과도하게 일본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한다는 선에서 타협되었다. 대부분의 비전문가들과 건축가들이 김수근의 오류를 인정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이것은 남들보다 앞서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수근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후 김수근은 한국성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가 운영하는 공간지와 공간소극장을 통해 사물놀이와 전통 춤 등을 발굴해내고 학술적인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건축에서 한국성은 완성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정지된 마당이 아니라 흐르는 공간이 전통의 본질
25년 후 다시 전통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되살아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후, 이른바 답사 열풍이 마침 불어닥친 자동차의 폭발적인 보급과 더불어 사회문화적인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과 여러 차례의 정치적인 풍랑 이후의 어수선하던 시대가 지나고 군사독재시대도 지나고,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의 민주적인 절차와 민주적인 눈높이가 생긴 시절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시절이었기에 전통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그때 지어진 집이 공교롭게도 그 문화에 불을 지핀 유홍준의 집이었다.
‘수졸당’이라는 당호를 가지고 있는 그 집은 김수근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집이다. 서툴다, 작다로 해석이 되는 ‘졸(卒)’함을 지키는 집이라는 의미의 그 집에는 미음자로 구성된 집 한가운데 손바닥만한 마당이 있다. 그 앞으로 낮은 한식 기와담장이 있고 마당 한가운데에 한 그루 나무가 한가로이 있다.
그 마당은 1990년대를 통쾌하게 관통했다. 20여년 전 형태로 계승하려던 한국성을 이제는 공간으로 재현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마당은 이후 한국 건축의 가장 선호하는 하나의 조미료가 되어 모든 건물 심지어 아파트, 일반 업무시설 등에까지 무분별하게 뿌려진다. 그 공간을 한국적이라고 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당에 한국은 없다. 채로 둘러싸인 마당과 마당을 감싸는 낮은 담장 그리고 한 그루 나무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1라운드가 시작되기 직전의 링과 같고 공간은 마치 막힌 연못에 고인 물처럼 흐르지 못한다.
한국 건축 공간의 특징은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갇히지 않고 흐르는 데 있다. 마당은 네모 반듯하면서도 한 귀퉁이를 열어 공간이 흐르게 한다. 그리고 그 다음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러나 수졸당의 ‘긴장된 마당’ 이후, 믿어 의심치 않고, 담과 나무로 긴장감이 감도는 마당이 한국의 전통이 되었다. 수많은 수졸당의 아류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마치 개량한복처럼 마치 국악 관현악처럼-그렇다고 그런 노력마저 꺾을 수는 없지만-아무리 눈을 씻으며 바라보아도 그 마당들은 일본의 마당과 너무 닮아있다. 마치 발가락이 닮았다고 우겨야하는 것처럼 서글프다.
그로부터 10년 후 건축가 방철린은 강화도에 ‘미제루’라는 주택을 설계한다. 미제루(未濟樓)라 한 것은 64괘의 마지막을 뜻하며, 바로 앞 괘인 63번째가 기제(旣濟)임에 반하여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늘 바뀌고 순환하는 속성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드러내놓고 한국건축을 표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집에 이르러 비로소 공간은 흐르게 된다. 이 집 역시 네모난 마당을 품은 미음자형 집이다. 그러나 이 집의 마당에는 긴장이 없고, 무대가 없다. 뒤에서부터 앞으로 공간이 흘러서 나간다. 전라도 땅처럼, 가야금의 소리처럼 쥐었다 풀고 당겼다 밀면서 사람과 공간이 어우러지는 것, 그리고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사람이 움직이는 공간, 그것이 한국 건축이 살려내야 할 전통의 참맛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