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봉에서 본 삼각산의 최고봉들-맨앞의 인수봉(仁壽峰804m)과 그 뒤로 겹쳐보이는 백운대(白雲臺836m), 그리고 그 왼편으로 만경대(萬景臺800m) (이렇게 세개의 봉우리가 삼각산이다.)가 위용을 자랑한다. 거대한 인수봉(仁壽峰)의 기암절벽-이를 정복하려는 자들이 개미같이 붙어있다 위문에서 성벽을 따라 백운대(白雲臺836m)로 오르는 길 철로 만든 손잡이에 의존해야만 오를 수 있는 백운대의 위용. 백운대의 거대한 암벽 백운대오르는 길에 얼굴을 내민 인수봉(仁壽峰) 만경대(萬景臺) 백운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인수봉(仁壽峰)의 기암 백운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만경대(萬景臺800m) 만경대 능선상에 있는 용암문(龍岩門)
삼각산은 서울부근에서 가장 높고 가장 산세가 수려 하여 서울의 주산으로 유명합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옛날 신라 때 중 도선(道詵)의 유기(留記)에
"왕씨를 이어 임금이 될 사람은 이씨이고 한양에 도읍한다."라 하였다.
그 기록 때문에 고려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 터를 잡아 오얏(李)을 심어 놓고
무성하게 자라면 문득 잘라서 왕성한 기운을 눌렀다.
우리나라(이씨조선)에서 왕위를 물려 받은 뒤,
중 무학(無學)을 시켜 도읍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萬景臺)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碑峯)에 갔다가 한 개의 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는 여섯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서 여기에 온다’는 뜻이며 곧 도선이 세운 것이다.
무학은 서둘러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 쪽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곳 맥이 합쳐져서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마침내 궁성 터를 정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고려때 오얏을 심던 곳이다.」(이익성역)글.사진 방철린 090823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