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虛)의 회복
디지털시대 속에서
콘서트홀에서의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음악의 세계로 빠지는 즐거움 뿐 아니라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활력소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바쁘다 보면 콘서트홀을 찾을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힘든 것이 현대인들의 생활이고 보니 음악이 듣고 싶은데도 시간의 여유가 여의치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집이나 직장에서 CD를 들으면서 연주회의 분위기에 빠져 본다.
예전 같으면 턴테이블에 30센티미터가 되는 음반을 사용했지만 새로운 현대의 디지털 기술로 녹음되고 만들어진 CD로 음악을 듣는 것이 이제 새로운 일이 아니다. 머리를 식히려고 영화 한 편을 보려하면 반드시 영화관에 가야했고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로 영화를 감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DVD로 디지털화된 영상물을 집에서도 홈시어터 장비에 걸어 근사한 입체음향과 함께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생활요소들이 하나둘 그 자리를 디지털기술에 내어주게 되더니 이제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이 디지털기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폰뱅킹을 이용하여 은행 업무를 보려면 전화기를 들고 전화기 속에서 나는 여자 목소리 같이 상냥한 기계목소리의 안내에 따라 단추를 눌러 업무를 보게 되고 영화관이나 기차표 고속버스표 예약도 이런 기계목소리의 안내에 따라 처리하여야 하며, 엘리베이터나 버스, 전철 을 타고 내릴 때는 물론 운전을 할 때에도 목적지만 입력하면 내비게이션 화면의 지도와 함께 기계목소리가 아주 상세하게 길을 안내하고 이에 따라 운전만 하면 어디든지 목적하는 곳을 갈 수 있다.
청소년들의 음악을 들려주는 매개체도 워크맨이라 하는 미니녹음기나 미니CD플래이어가 구시대의 유물이 된지 오래고, 크기와 형상을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발달한 MP3를 이용하는 지금은 한 번에 저장하는 음악의 양도 또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하였고 이제 플래이어가 필요없이 디스크에 바로 이어폰을 꼽고 들을 수 있어 음악복제가 불가능한 디지털 디스크가 선을 보이고 있다.
현대인들은 매일 매일을 이렇게 격심하게 디지털시대로 치닫고 있는 격변기 속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디지털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의 심성을 보면 그 면모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에 의해 사람들의 사고가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격이 급해지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이해심과 포용력이 줄어들었으며 자기주장만 내세우려는 개인주의적 성격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을 디지털 세계 속에 파 묻혀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 치중해 왔던 과거와는 달리 매일 매일을 기계와 함께 살면서 사람의 속성과는 다른 기계적 속성에 영향을 받은 변화라 생각한다.
우리들이 이제까지 살아 온 사람끼리의 생활과 대화 속에서는 대명사로만의 대화도 가능하거나 명료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거나 설사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여도 또 간단한 손짓 하나로도 대의를 파악하여 그 뜻이 전달됨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사람들의 집단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이것은 명료한 명령어와 정확한 순서 그리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아야만 작동을 하는 기계류들과는 달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비논리적인 속성, 명료하지 못한 속성, 그리고 감성적인 속성이 반대로 이런 대화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이지 못한 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뜻이 모두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콩 심은 데 콩만 나오고 팥 심은 데 팥만 나오는 기계들과의 대화의 세계와는 달리 콩 심은 데 팥도 나오고 감자도 나오는 것이 인간세계의 대화인 셈이다. 그러니 비논리적이고 애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지만 인간끼리의 대화에서는 포용력과 이해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인 인간이 정확성과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를 요구하는 디지털시대의 기계와 매일을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마음의 여유나 이해심이 없어지고 정서적으로도 점점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본다.
아날로그이진법과 디지털이진법
더 나아가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가 디지털시대의 근본이 되는 이진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디지털 이진법은 동양사상의 이진법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음양의 조합으로 구성된 동양의 이진법과는 다른 ‘있고’ ‘없고’의 개념 즉 0과 1즉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의 개념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이진법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개념상의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주역 계사상전 제 11장에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 라고 되어 있으며 대산 김석진선생은 주역강해에서 ‘태극이 만유의 본바탕으로서 만물이 나오고 돌아감이 모두 이로 말미암는다’ 라고 하고 ‘태극은 시공의 이치를 포함하고 있으니, 만물을 모두 포함한다는 공간적인 뜻과 처음부터 끝까지를 포함하는 즉 태초부터 궁극에 이르는 시간적인 뜻이 함께 있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동양의 이진법은 태극원리의 철학적 개념에 근거를 하고 여기서부터 발전하여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음과 양의 이치로 구성되어 있다는 해석과 함께 ‘조화’와 ‘공존’의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있고’ ‘없고’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디지털시대의 이진법은 ‘공존’이 아니라 ‘선택’의 개념으로 구성되는 커다란 개념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순해 보이는 개념적 차이가 이러한 이진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사고의 틀마저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레코드판은 플라스틱 성분의 동그란 판에 음악의 진동을 따라 홈을 파놓은 것으로 턴테이블을 돌려 바늘이 이 골을 지나면서 발생하는 진동을 증폭하면서 소리를 내는 형식으로 바늘이 이 골을 지나면서 음악소리와 함께 발생하는 잡음을 완전히 제거할 방법이 모색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들으려면 음악과 함께 나오는 바늘소리를 빼놓고 듣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아날로그시대에는 이것은 어찌 보면 음악소리와 함께 나오는 필연의 소리로 여겨왔다. 그래서 그 바늘소리가 있어 약간은 불편하다 했겠지만 이 바늘소리는 공존하는 소리로 인정을 하고 오히려 그중에서 음악소리만을 골라서 듣는 능력을 발휘해 온 것이 사실이고 어찌 보면 이것이 아날로그시대의 음악 감상법이었는지 모른다.
영화감상도 마찬가지이다. 영활필름이 깨끗할 때에는 덜 하지마는 조금 상영을 많이 한 필름으로 영화감상을 하려고 하면 소위 비 쏟아지는 것 같은 화면으로 영화를 감상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잡음이나 잡화면도 음악 감상이나 영화 감상 시 따라다니는 필연 물로 여기고 같이 살아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존’의 개념이 들어있는 동양의 이진법이며 아날로그적 이진법인 것이다.
서양의 이진법은 있고 없고의 개념에 의해 꼭 필요한 것만 선택적으로 사용을 하고 필요 없다고 보는 잡음 같은 것을 없애버리는 방법을 통해 명료함만이 선택되어 우리 귀에 들어오고 우리 눈에 들어온다. 선명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들만 받아들이다 보니 모든 선택도 명료해지고 생활도 또한 이러한 원칙에 따라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결정은 정서적으로 상당히 메말라 가고 이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마저도 이런 마음으로 보게 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전 같으면 상대방의 약점이 있어도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이해심을 발휘하고 또 이를 눈감아주며 장점을 살려 정을 나누고 살아왔었는데 이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방의 약점이나 단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 것이 이유가 되어 헤어지거나 상대를 제거해야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디지털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아날로그적 개념인 ‘공존’의 세계를 벗어나 디지털의 이진법의 원칙인 ‘제거하느냐 마느냐’의 세계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조금이라도 디지털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서 좀 더 인간적이고 정서적으로 메마르지 않은 정상적인 성격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생활을 하는 환경의 어떤 요소들이 혹시 이들의 사고전환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건축 속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도덕경의 허(虛)의 이야기를 잠시 해 보고자 한다. 도덕경에서 이야기하는 허(虛)에 대한 개념이 사람의 마음을 디지털적인 데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자세로 가게 할 수 있는 단초(端初)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허(虛)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其復 夫物芸芸 各歸其根
歸根曰靜 靜曰復明 復明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도덕경 제16장)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만물이 더불어 자라나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로다.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일컬어 고요함이라 하고, 또 이를 일러 제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제명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어 흉을 짓는다.
늘 그러함을 알면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고,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하면 천하가 귀순한다.
천하가 귀순하면 하늘에 들어맞고, 하늘에 들어맞으면 도에 들어맞는다.
도에 들어맞으면 영원할 수 있다.
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아니하다.
도덕경에서는 만물은 무엇이든 그 것을 완전히 비움으로서 그 것의 뿌리가 되는 근본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이런 상태가 곧 도에 들어맞으며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유지되어야 영원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완전한 빔의 상태를 허(虛)라고 이야기한다.
허(虛)의 회복을 위하여
‘허’를 우리의 자연환경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현재와 같이 오염되고 변질이 되어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균형이 깨져서 환경호르몬이 생기고 빙산이 녹아내리며 오존층에 구멍이 생기는 등 생물들에게 치명적인 환경을 제공하게 되고 생태계가 파괴되어 생물들이 온전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잘 못된 요소들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허’의 상태가 되어야 영원히 안정된 생태환경으로서의 온전한 지구가 유지 된다고 본다. 강이나 바다 산 등도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자연에서의 ‘허’다.
그렇다면 도시와 건축에 있어서의 ‘허’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 것이 존재한다면 그 것은 과연 어디에 담겨져 있을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청계천의 복원 이후에 서울 중심부 기온의 변화가 생긴 것도 그렇거니와 청계천을 찾는 시민의 마음이 풍부해 지는 것을 보면 서울시의 중심부에 ‘허’가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에 있어서 자연요소로서의 ‘허’다. 도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한국도시의 옛 모습 속에서 그리고 전통건축에서 우리는 많은 ‘허’의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발견된 많은 요소들은 디지털시대의 아날로그적요소로 현대도시나 건축에서의 ‘허’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천히 길게 SLOW & LONG
현대인들은 사이버세계 속에서 디지털기계와의 대화로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사실상 무의식 속에는 하루 종일 감정도 없는 기계음성과 대화해야 하는 허무함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더 아날로그적 경험을 다양하게 격을 수 있는 공간과, 이웃하는 사람을 가급적 많이 접촉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찬스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한국도시의 옛 모습 속에 있는 구불구불한 길과 모퉁이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가치를 발견하지 않았는가. 가급적이면 좁은 길 가급적이면 구불구불한 길이 건축물 내외에 파고들어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다닐 수 있도록 하고 길게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런 건축적 장치 속에서 현실세계 사람들과 서로 대화를 유도함으로서 고독한 시간을 가급적 줄여주어 사이버세계의 공허함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같이 사는 사람들 서로를 이해하며 의견의 공통영역 형성을 통하여 공동체의식에 젖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치로서의 공간과 장소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본다.
북이십일사옥과 교육과학사사옥 등을 비롯한 건축물들은 지하실에서부터 옥상에 이르는 계단과 통로에 다양한 변화를 줌으로서 건축물 내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을 될 수 있으면 많이 마주치도록 하였다.
불확정성 UNCERTAINTY
우리는 너무나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언어세계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로 규정해 놓은 공간 속에서 언어가 규정해 놓은 생활의 틀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파트 문화이다. 가치관이나 추구하고자 하는 부분이 무엇이냐에 따라 생활 속에 규정해 놓은 언어도 다를 것이고 행위도 다를 것이고 공간적 성격도 달라야 됨에도 불구하고 닭장 같은 똑같은 공간, 틀에 박힌 똑같은 언어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똑같이 틀에 박힌 생활을 한다.
사실 이런 틀에 맞춘 생활 이외에도 예기치 못한 불확정적 행위가 있을 수 있고 이런 불확정적 행위를 수용할 준비된 공간과 장소가 필요함에도 현대인들은 늘 이런 것을 감수하고 다람쥐 같은 생을 살아간다. 더욱이 사이버세계, 디지털세계 속에서 해 메는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은 더욱더 현실세계에서 멀어질 수 있어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풍부한 현실세계를 영위할 공간을 더욱더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기능적으로 역할이 분명하게 정해져 거실, 식당, 침실 등과 같이 실명이 정해진 서양건축과는 달리 한국건축은 남녀의 생활을 규정짓는 영역의 구분은 분명하지만 정지, 곡간, 마구 등과 같이 지극히 기능적인 실을 제외하고는 방, 청, 마당 등과 같이 고정된 기능을 벗어나서 불확정적 행위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장소적 가치를 가진 공간들로 구성된다. 이런 공간이 바로 디지털시대에 필요한 아날로그적 공간이고 건축의 ‘허’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본다.
건축 속에서 이러한 공간적 개념을 심어줌으로서 현재 또는 미래에 일어날 다양한 미지의 행위를 담을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될 것이다. 북이십일사옥과 교육과학사사옥의 경우 지하실에서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불확정적 성격을 가진 다양한 공간을 준비하였다. 스토리하우스나 서현동 스튜디오 그리고 도수리 주택에서도 이런 ‘허’의 성격을 가진 많은 공간들이 나타날 것이다.
투명성 SEE THROUGH
도시 속에서의 건축물의 자세를 어떻게 갖게 하느냐는 도시인에게 상당한 심리적 영향을 미치게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 속에 사는 사람들은 건축물의 숲 속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시선이 차단된 채 갇혀 살기 일 수다. 이 같은 상황이 하루 종일 높은 담이 쳐진 형무소에 사는 처지와 무엇이 다른가.
답답하고 좁은 개인의 공간에 갇혀 매일 매일을 컴퓨터와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도시인인데 컴퓨터는 발달하여 사이버 세계 속에서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생생한 경험을 오랫동안 하게 되다보니 사이버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이버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현실세계에서 행하려 하는 이른바 리세트(reset) 증후군이 뭇 현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런 일로 웃지 못 할 범죄까지 일어나는 현실을 우리는 감당해야한다.
이러한 병적증세에서 현대인들을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건축물을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으로 해야 함은 물론 도시적 폐쇄성도 가급적 제거시켜서 서로 소통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도시의 ‘허’, 건축의 ‘허’이며 디지털시대에 꼭 필요한 아날로그적 요소라 생각한다. 건축물의 입면 의 가운데를 비운 건축이나, 투명하게 처리한 건축물을 관통하여 건너편의 사정을 파악하고 서로를 인식할 수 있다면 인간은 좀 더 사이버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의 환원이 빨라지고 좀 더 인간적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심적 배려를 아끼지 않게 될 것이다.
교육과학사사옥은 정면의 통로부분을 모두 투명하게 처리하고 시선의 관통을 꾀하여 뒤쪽건축과 시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북이십일사옥에서는 복도부분을 동서방향으로, 그리고 스토리하우스에서는 최상층의 중앙부분에 하늘마당을 두어 남북방향으로 관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현동 스튜디오나 도수리 주택에서도 투명한 창을 통하여 같은 시도를 꾀하였다.
의외성 UNEXPECTEDNESS
건축에 있어서의 의외성은 도시인에게 신선함을 제공하는 위트이며 유머이다. 늘 같은 일을 반복하고 컴퓨터의 기계음성과 생활을 해야 하는 디지털시대의 도시인들에게 건축에 있어서의 의외성은 잠시나마 도시인 특유의 고독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디지털세계에 빼앗겼던 마음을 찾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건축의 ‘허’라 생각한다.
도로에 면한 교육과학사 사옥 중앙부분은 콘크리트 담과 개구부로로 구성되어 이곳이 이집의 대문 역할을 하도록 하였는데 사실은 양쪽에서 튀어나온 캔틸레버 벽체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두 개의 벽체는 중앙부분과 벽체하부가 떨어져있다. 마당일거라고 생각한 중정 에는 물이 있고 계단에 오르려면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캔틸레버계단과 삼층 난간상부는 바깥으로 캔틸레버는 의외의 요소로 읽히리라 생각한다. 북이십일사옥의 주출입구상부의 구조나 4층의 발코니, 3, 4층 외부로 튀어나온 계단 등도 같은 요소라 본다. 한국가드너사의 스토리하우스에서도 이런 노력을 하였다. 최상층메스의 삐뚤어짐, 1층에서 3층에 오르는 계단과 그 계단 좌측에 있는 동화캐릭터가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이런 작용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컴퓨터와 대화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니 다른 사람과 대화도 필요 없고 원고지가 없어서 사다 달랠 일도 없으며 어떤 스케치 북이 좋고 어떤 바둑판이 바둑 두기가 좋다는 정보도 필요가 없는 시대, 원고지며 스케치 북이며 영화필름이며 바둑판이며 모두가 지난 세기의 유산으로 박물관에 가야 할 시대가 되다보니 인간은 점점 더 디지털의 시대로 깊숙이 빠져들고 시간이 갈수록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할 시간이 짧아져 대화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고 인간의 공동체적 의식은 점점 더 배타주의나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시대에 사람의 마음을 되돌아오게 만들어주는 도시와 건축의 필수 조건으로서의 ‘허’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비로소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세상이 열리고 또 그런 세상이 지속되리라 믿는다.
글:방철린 (건축문화0602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