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건축가 방철린이 한길회의 연혁에 관하여 쓴 글로 한국건축계의 건축그룹에 관해 새건축사협의회가 발간한 건축과 사회 제25호 2013특별호에 실렸던 내용이다.
한길회
한양대학교 건축과 출신들의 모임인 한길회는 올해로 46주년을 맞았다. 한길회 역사는 46년이지만 한양대학교 역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에 세워졌으므로 한양대학교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현대화과정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한길회 회원들의 초기 멤버들은 파란만장했던 20세기 대한민국역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20세기 대한민국 역사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연속이었다. 1945년, 36년간의 일본으로부터의 핍박 속에서 해방을 맞이하기는 하였지만 반쪽짜리 정부수립으로 기쁨보다는 씁쓸함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속앓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완성되지 못한 반쪽의 독립과 자주의 기쁨을 찾는가 했더니 이도 잠시, 북한의 침공으로 전 국토는 폐허로 되어버리고, 국민들 마음은 온통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6.25전쟁이 끝난 이후의 혼란한 시기 속에서는 새로운 전기를 채 마련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 부패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1960년 4.19혁명이라는 젊은이들의 뼈아픈 희생이 요구되었고 이도 모자라 곧 이어 1961년 군사 쿠테타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군정시대가 시작되면서 극도의 가난함에서의 국가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문화보다는 산업의 발달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산업화의 성공으로 국민들의 주머니는 나아지고 있었지만 이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건축과 출신들은 문화에 대한 갈구로 목말라 하였다. 배는 불러졌지만 머리와 가슴은 여전히 비어있는 상태가 유지되니 무언가 이 문화적 욕구를 채워줄 돌파구를 마련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길회가 태동은 이때부터 준동되기 시작하였다.
이시기를 보냈던 한길회 선배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수십 년을 혼돈으로 일관해왔던 우리 사회는 5.16군사혁명 이후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으며 건축계도 예외일 수만은 없었다. 1963년 12월 16일 건축사법이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통과하자 곧바로 공포되었고 건축사시험에 대한 반발이 어느학교 출신을 불문하고 거세게 일어났으며 급기야 종로예식장의 대규모 집회에서 ‘건축동인회’를 결성 건축사 시험거부 운동에 들어갔다.”라고 60년대중반 건축을 전공한 젊은이들의 움직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이후 한길회의 태동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그 이후 건축에대한 대화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왔던 한양대 학교동문인 신 현대(1회 1952년졸업), 구 윤회(3회), 김 지태(5회) 등이 모여 건축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건축모임을 만들자고 발의하였으며 구 윤회의 발의로 「한길회」라고 모임의 명칭을 정하면서 한길회는 시작되었다. 곧 이어서 김 종옥(2회), 한 창진(4회), 안 기태(6회), 한 용섭(6회), 이 장복(7회), 유 경철(8회), 유 규성(8회), 장 석웅(9회), 이 흥수(9회), 김 일영(9회)등이 회원으로 등록되었으며 안 기태, 유 경철회원이 총무역할을 도모하였다.”
그때의 기록을 보면 한길회의 태동은 이 모임이 건축작품 활동에 필요한 제반지식과 정보교환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라는 기대로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어떤 건축적 이념이나 사상을 갖고 그를 실천하기위한 모임으로 시작 했다기 보다 혼란이 거듭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적 사회에 대한 엘리트적 반발과 건축가가 가져야 할 사회에 대한 문화인으로서의 정신과 청교도적 갈구 그리고 한국 현대건축의 미래에 대한 선구자적 걱정 등이 발로로 보이며 따라서 구체적인 이념을 앞장세워 건축의 진로를 표방 한다기 보다 건축가적인 자질을 배양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폭넓고 저력 있는 건축 활동이 한국건축의 미래에 이바지할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길회가 태동하기보다 더 이전인 1961년도경 9회 김 일영을 비롯한 몇 명의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그룹 활동을 시작하였다. ‘세미나건우회’란 이름으로 학생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매일만나 후배들을 교육하고 여름방학 동안에 합숙을 하며 설계공부를 하여 여름방학이 끝나면 이를 들고 밖에 나가 신문회관(지금신문회관 빌딩자리에 있었음)이나 조흥은행갤러리 등에서 건축 작품전을 매년 해왔었던 경력이 있었다. 68학번인 필자가 이 모임에서 10회 회원니까 한길회 시작시기보다 훨씬 일찍 많은 회원들이 학생 때부터 경험을 쌓아 왔었고 이런 경험을 쌓아온 사람들이 후에 많은 한길회 회원으로 편입 구성되었다. 세미나건우회 회원으로 한길회에 영입된 사람은 김 일영, 서 천식, 윤 석우, 이 특구, 류 춘수, 최 동규, 방 철린, 최 영집, 이 용선, 진 정, 조 인숙 등, 그 외에도 많은 회원이 한길회에 소속되었다. 세미나 건우회는 15회(조인숙) 를 끝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한길회 회원의 밑거름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기록을 보면 본인이 입회(1992)하기 전 한길회는 대학교수들과 회원을 초청하여 토의나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건축에 대한 다양하고도 깊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교수와 회원, 회원 상호간의 우의도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원로교수인 박 학재 교수를 비롯하여 송 민구, 김 수로, 이 해성, 유 희준교수 외에 많은 교수들이 초청되어 주로 근대건축에 대한 초청강연을 하였고 자체회원이었던 한 창진, 안 장원, 권 태문회원 등이 주제를 정하여 자체 세미나를 가졌다고도 하였다.
한길회의 대표에 대해서는“회장이 없이 총무만 있는 모임으로 출발하였다. 회원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는 모임, 다른 모임보다 앞장서려는 마음이 아니라 남과 공존하려는 마음을 가진 모임으로 성장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래서 활동도 외부 노출적 활동이 아니라 내실을 기하는 내부활동 위주로 모임을 이끌어 나왔었다.” 라고 하여세상에군림하는 단체로 시작 했다기 보다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건축계의 문화수준의 향상과 건축이 사회발전의 모태가 되기 위한 초석이 되길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2년 회원이 늘어남에 따라 처음 한길회 정관이 탄생되었고 총무단이 활동업무를 보며 지속적인 활동을 꾸준히 진행해 오게되었다. 92년도 이전까지 활동한 총무는 김 지태, 안 기태, 한 용섭, 이 장복, 유 규성, 유 경철, 이 흥수, 안 장원, 김 한근, 이 문우, 이 후근, 김 춘웅회원 등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1992년 한길회 창립25주년을 맞이하여 회원의 활동상활을 서로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지면을 통하여 건축관련 연구내용을 발표할 수 있는 News Letter발간이 발의되었고 1992년 9월 29일 「한길회」창간호를 발행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한길회의 활동의 활성화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총무는 오 용부회원이었으며 편집위원장에 권 태문, 편집위원에 양 해윤, 최 동규, 방 철린회원이 활동하였다. 회원들은 News Letter를 통하여 건축계와 문화계의 변화를 서로 인지할 수 있었으며 회원들의 건축적 사고 와 활동상황에 대해 지면으로 발표할 기회를 갖게 되어 타회원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94년도부터 좀 더 적극적인 그룹 활동을 위하여 회칙도 만들고 활동범위도 넓히자는 제안이 나와 이를 위한 회의가 여러 차례 있었고 준비를 거듭한 결과 1995년 총회에서 그 동안 준비한 한길회 회칙과 회장제에 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 되어 초대회장에 윤 석우회원이 추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세미나 모임을 주 활동으로 일관해오던 활동에서 폭을 넓혀 국내외 문화유산답사가 실시되었으며, 인터넷홈페이지제작과 운영으로 활동의 포커스가 맞춰지고 또 확장되었다. 해남일대와 보길도답사를 시작으로 국내 많은 지역의 문화유산답사가 이루어졌으며 일본규수지방문화유산을 비롯한 인도네시아족자카르타지역과 발리, 일본 나오시마, 스페인, 일본의 문화유산과 건축 답사가 이어졌고 현재까지도 이 국내외 문화유산답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길회 30주년이 되던 1997년에는「한길30년」이란 책자발간은 물론 많은 건축가들을 초청한 가운데 학술세미나와 출판기념회를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가졌다. 이날 학술세미나는「한국건축의 국지성과 총체성」라는 제목으로 있었으며 발표 와 토론 및 진행자로는 류 춘수, 김 병윤, 정 진국, 유 건, 장 림종,방 철린 등이 담당하였다. 출판기념회에서는 한양대학교 이 해성 전 총장, 원 정수교수, 지 순교수, 강 석원 당시 건축가협회회장과 황 일인 부회장 그리고 목구회, 금우회 회원을 비롯한 많은 건축가들이 30주년과 도서출판을 축하하기 위하여 참석하였다. 기념책자인 한길30년은 1967년부터 30년 동안의 건축과 문화계의 큰 사건 그리고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 관련 사건들이 연대기에 정리되었으며 좌담, 논문 ,칼럼, 기행문과 함께 한길회 회원작품30여점이 수록되었다.
그 이후 양 해윤, 방철린, 김 병윤, ,최 동규, 박 경립 그리고 인 의식회원 순으로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우 경국, 조 인숙, 유 태용, 김 원식, 이 종호, 김 성홍회원 등의 도움에 힘입어 시대적 상황에 적절한 테마를 주제로 하는 국내외 문화유산과 명승지 그리고 회원작품 에 대한 답사와 세미나가 현장감 있게 이루어져 왔다.
2013년도에는 장학제도가 시작되었다. 2012년도부터 교수진회원들 사이에서 장학금제도의 필요성이 이야기되었고 정식으로 발의되고 결의되고 모금이 시작되었다. 모금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3년부터 이 장학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수혜자의 수가 적지만 시간을 두고 점차 수를 늘이기로 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학재 원로교수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박학재어워드」라 명명하고 1대 간사는 김 성홍회원이 담당키로 하였으며 심사위원인 방 철린, 인 의식, 이 종호 회원의 엄정한 작품심사결과 장학금수혜자가 우 지효핛학생으로 결정되었다.
한길회 초기의 회원은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건축설계를 하는 부류로 주로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축설계와 교수부문 그리고 건설분야와 건축 관련 업무분야에서 일하는 회원들로 폭이 넓어졌다. 교직에 있으면서 후배들 양성에 힘쓰는 교수진과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기 건축관을 피력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부류 그리고 건설 분야와 건축 관련분야에서 건설과 관련분야에서 성취도를 높이는 일에 전념 하는 경우다. 특히 앞의 두 부류는 학교와 건축단체에서 사회활동과 봉사를 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흐르고 회원수가 늘어나면서 특별히 자격을 정한 것은 없지만 건축전문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자를 우선대상으로 삼아왔고, 회원 입회는 정관에 따라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입회승인 절차를 거친 후 회원자격이 발생되는 것으로 원칙을 삼았다.
한길회가 46년의 역사를 갖다보니 벌써 유명을 달리한 회원의 수도 상당수에 이르고 세대격차 또한 많다. 이렇게 많은 회원을 보유한 한길회로서는 활동이나 여행은 꼭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활동과 여행을 통하여 회원 간의 연령 격차를 좁혀주고 서로를 알고 이해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길회의 단체 활동은 발기 초기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단체가 갖고 있는 건축적 사고나 철학을 표방하거나 이슈를 대외적으로 내어놓는 일을 한다기보다 회원 간의 모임 속에서 대화하며 내실을 기하는 일에 집중해왔다. 긴 역사가 있어 여러 세대가 같이 공존하는 만큼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여 개인적이고 외골수에 빠지기 쉬운 건축에 대한 철학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보다 지혜롭게 키워갈 수 있는 단초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 역할이 회원 하나하나에게 건축전문가로서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어 사회에 보다 양질의 건축문화를 전파하는 일원이 되기를 기대한다.
글 방 철 린
한길회 연혁 1962.1-2013.10.05
일시
내 용
회장
1962.1
5.16군사혁명 후 전국적인 사회구조재편과 각계의 제도정립 필요성에 따라 1962.1.20. 건축법이 공포되고 이어 1963.12.16. 건축사법이 제정되었고 건축계에도 필연적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여러 시행착오와 진통 끝에 1967년에 이르러 인정을 찾아 나가다 시작한다.
1964.9
건축사법에 따라 건축사시험이 발표되자 건축사시험 거부운동으로 각 대학연합모임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각 대학별 모임이 태동되기 시작하다.
1967.3
새로운 상황 속에서 동문간의 결속과 건축계 역할의 구심점을 갖는 모임이 있어야겠다는 공통분모를 지각하고 구윤회(3회) 안기태(6회) 유경철(8회)등이 중심이 되어 월례회 형식의 모임을 갖게 되니 한길회 첫 발자국이 이루어진다.
1968.3
경제발전에 따라 건축계의 역할이 증대되고 모임을 더욱 활성화 시키기 위하여 신현대(1회) 구윤회(3회) 김지태(5회)등이 발기인이 되어 건축을 이야기하는 모임의 틀을 잡고 구윤회 회원의 발의로 명칭을 ‘한길회’(큰길,한길을 걷고자 하는 모임)로 결정하다.
1969.3
김종옥(2회) 한창진(4회) 안기태(6회) 한용섭(6회) 이장복 (7회) 유경철(8회) 유규성(8회) 장석웅(9회) 이흥수(9회) 김일영(9회)등의 회원들도 함께 모여 건축에 관한 세미나와 건축에 관한 토론등을 하며 모임을 굳혀나가게 된다. 모임의 성격을 자유롭고 틀에 메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회장은 두지 않기로 하고 총무체제로 끌어 나가기로 한다. 초대총무로는 김지태, 부총무는 안기태, 유경철이 회모임을 주관하고 회원들의 동정를 살펴 연락하는 일을 맡아 수고하게 된다.
1970.3
EXPO'70이 오사카에서 열려 선진건축을 접하게 된다. 건축계의 새바람이 일어남에 따라 최창규, 이승우, 김수근, 송민구선생들의 발의로 한길회만의 모임을 가질 것이 아니라 도든 건축인들의 모임을 만들어 보자고 하여 한길회를 중심으로 구윤회, 안기태회원 등이 참여하여 논의하다 김수근 선생이 ‘100E'회라는 명칭을 제의하였고 뉴서울 호텔 대회의실에서 첫모임을 성대하게 가졌으나 확대 발전되 못하고 무산된다. 그러나 한길회는 회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건축계의 빼놓을 수 없는 모임으로 부상하였으며 한양대학교 건축과의 동문회 역할도 일부 감당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1971.4
비상사태 선포 후 집회가 자유롭지 못하던 때 어렵게 집회허가를 받아 문화공보부 시사실에서 송민구선생을 초청 ‘근대건축의 사조’라는 주제로 세미나을 가졌고 김수근선생의 후원으로 ‘黑部의 太陽’이라는 건설관계일본영화를 감상하였다. 회원 외에도 각대학교수,설계사무소소장, 기업체 임직원들이 다수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한길회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1971.10-82.2
오창희 ,선병택,유희준,박학재,홍붕희,이해성교수,최창규선생,이원균씨,김을규씨,초청 세미나를 하였으며 안장원,한창진,권태문회원 들의 발표를 꾸준히 진행함.‘